키링 다이어리 9 - 제주도(Jeju Island)
어스름한 새벽에 추워서 잠이 깼다. 메콩강 주변이라 그런지 춥네라고 생각하며 무심코 전기장판 코드를 콘센트에 꽂았는데, 뭔가 이상하다. 베트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정갈하고 익숙한 침구류에 순간 멍한 상태가 되었다. 이불속에서 눈을 끔뻑거리다 방 밖으로 나왔는데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풍경이 날 반겼다. 비몽사몽 상태인 채로 밖에서 안개를 구경하고 있는데 번뜩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 맞다. 나 제주도 왔지. 베트남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돼서 인지 제주도에 왔다는 사실을 순간 잊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베트남이라고 생각하다니. 마치 강가인 마냥 중산간에 피어오른 안개가 물안개처럼 느껴져서 웃겼다. 이 안개 때문에 아마도 나는 메콩강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고 착각했나 보다. 혼자서 미친 사람처럼 키득대고 있다가 좀 더 자야지 싶어서 방에 들어가 누웠다. 다시 깨었을 때는 메콩강이 아닌 중산간임을 확실히 자각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
짧게 잠들었다가 깨었다. 구석자리에서 자고 있던 유희도 어느새 깨었는지 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잘 잤어요?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어제 우리 친구 먹었는데, 웬 존대냐고 그래서 빵 터졌다. 친근하게 어젯밤에 친구 하기로 해놓고서 아침에 일어나서는 리셋된 상태로 다시 존대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상황이었다. 유희와 각자의 침대에 누워 이것저것 수다를 떠는데, 갑자기 배가 너무 고팠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식사를 하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데, 우리 둘에게는 차가 없었기에 두부 오빠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두부 오빠는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거의 열한 시가 다 된 시간쯤 드디어 두부 오빠가 일어났다. 어디로 움직일까 얘기를 나누다가, 공교롭게도 오늘 세화리에서 벨롱장이 열리는 날이어서 벨롱장을 구경하고 밥을 먹기로 계획을 세웠다. 두부 오빠차에 나와 유희, 동갑내기 친구 강현이가 함께 타고 우리는 설레는 기분으로 벨롱장으로 출발했다.
*
세화로 가는 길, 길에 핀 벚나무가 너무 예뻐서 잠시 차를 세워두고 풍경을 감상했다. 차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아서 사진 찍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날씨만큼이나 길가에 시원하게 펼쳐진 벚나무들의 모습이 제주의 봄은 이제 시작이라고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길가에서 잠시간 각자 포토타임을 가지고, 우리는 세화로 다시 차를 움직였다.
*
얼마 만에 온 세화인지. 한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동네였던 세화리. 세화에 오니 벨롱장 때문인지 바닷가 주변이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인파를 뚫으며 벨롱장 구경을 시작했다. 유희는 캔들을 산다고 했고, 나는 괜찮은 키링이 있으면 키링을 하나 구입할 생각이었다. 한창 키링이 어디 있나 찾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제주에서 위빙 샵을 운영하고 있는 언니. 잠시 인사를 나누고, 땡볕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에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가방에 있던 에너지바를 건넸다. 확실히 제주에 오니 반가운 얼굴을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 그 장소가 어디라 하더라도. 다시 키링을 찾으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대박. 몇 걸음 가지 않아서 취향저격인 키링을 발견했다. 내가 애정 하는 한라산 소주를 귀엽게 만들어 놓은 키링을. 바로 구입할까 하다가 우선 더 돌아보고 와서 사기로 했다. 혹시 더 마음에 드는 키링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벨롱장을 한 바퀴 도는데, 키링 파는 곳은 더 있었지만 한라산 키링만큼 날 사로잡은 키링은 없어서 결국 다시 그곳으로 돌아왔다. 한라산 키링과 더불어 해녀 모양의 키링도 같이 팔았기에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해녀 키링을 샀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한라산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한라산 덕후였기에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한라산 키링을 사고 뒤를 돌아보니 다들 ‘역시 저거 살 줄 알았어.’라는 반응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올레 소주 모양의 키링이라면 패스했을 테지만, 한라산이니 어찌 안사고 배기리. 다들 모르겠지만, 나의 한때 꿈 중의 하나는 한라산 공장의 주주가 되는 거였다. 그러니 이 키링과 조우한 건 마치 내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벨롱장에 오길 참 잘했다. 벨롱장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라산 키링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