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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그렇게도 좋냐?

키링 다이어리 10 - 제주도(Jeju Island)

by 석류

IMG_7066.JPG 나의 추억 하나가 사라졌다. 삼춘의 칼국수 맛은 잊지 못할거에요.


벨롱장 구경도 다했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함덕 쪽에 있는 잠녀 해녀촌으로 가기로 했다. 세화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뭘 먹기가 애매할 것 같았다. 사실, 잠녀 해녀촌으로 가게 되기까지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종달리 쪽에 간판도 없이 영업하던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 칼국수 맛이 기가 막혀서 원래는 그리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람. 종달에 갔더니 그 가게가 없어져있었다. 나를 기억하고는 내가 갈 때마다 칼국수와 궁합이 끝내주는 열무김치를 항상 주인 삼촌이(제주에서는 남녀 상관없이 다 삼촌이라고 부른다. 경상도에서 이모라고 부르듯이.) 내어주곤 했는데. 허탈함과 아쉬움에 할 말을 잃었다. 다른 곳들이 다 유명해져도 이곳만은 나만의 맛집으로 남겨두고 아끼는 사람들에게만 소개했었는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되돌아서는데 참 씁쓸했다. 나의 제주에서의 추억 한 귀퉁이가 사라진 기분이 들어서.



IMG_7076.JPG 치저스의 치즈 스테이크는 일품이었다.


그렇게 잠녀 해녀촌으로 가기로 하고 움직이는데 가는 길에 요새 핫하다는 푸드트럭이 눈에 띄었다. 식사 전에 간단히 맛만 볼까? 하고 치즈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스테이크가 푸드트럭 치고는 기대 이상의 퀄리티였다. 치즈와 어우러져 한없이 부드럽고 고소했다. 이렇게 부드러운 스테이크는 처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기나긴 웨이팅을 감수하고서라도 먹을 만한 맛이었다.



IMG_7077.JPG 오랜만에 간 잠녀해녀촌.

IMG_7086.JPG 아프리카 게스트하우스에 가면 테라스에 앉아 짜이를 마셔줘야 한다.


잠녀 해녀촌으로 와서 식사 겸 간단히 낮맥을 하고, 근처에 있는 아프리카 게스트하우스에 들르기로 했다. 그곳에서 보는 바닷가 뷰는 최고다. 아프리카의 주인장인 촌장님이 끓여주시는 짜이티의 맛도 별미이고. 아프리카에서 반가운 사람들도 잠시 만나고, 촌장님과도 인사를 나누고 저녁에 바비큐 파티를 하기 위해 장을 봤다. 고기보다 술을 더 많이 산 것 같은 건 나만의 느낌일까.



이제 슬슬 다시 숙소로 돌아가나 했는데, 유희가 녹산로에 가자고 말을 꺼냈다. 지금 녹산로 벚꽃과 유채가 예쁘다고. 이왕 나온 거 보고 돌아가자 싶어서 녹산로로 향했다.



IMG_0269.JPG 벚꽃과 유채꽃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던 녹산로의 봄.


녹산로로 진입하는데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커플도 많았고. 공교롭게도 우리 넷 다 솔로였다. 그래서 십센치의 봄이 좋냐?? 를 틀었더니 다들 타이밍이 절묘하다며 빵 터졌다. 그 반응에 힘입어 제일 큰 사운드로 틀고 창문을 열고 녹산로를 지나가는데 맞추기라도 한 듯이 다들 후렴구를 따라 한다. 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랑 몽땅 망해라 망해라. 이 부분을. 그러나 우리는 잠시 후 그 멍청이 대열에 합류했다. 차에서 내려서 본격적으로 녹산로 구경을 시작했으니까. 역시 사람일이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



IMG_7137.JPG 역시 바비큐는 야외에서 해야 제맛이다. 그 덕분에 이틀 연속 욜 게스트 하우스에 묵었다.


녹산로 구경까지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오늘 묵는 게스트들이 다들 우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의 몫까지 장을 봐왔기 때문이다. 이미 이틀째 얼굴을 맞대고 있어서 부쩍 친해진 우리와는 다르게 다들 아직 어색한지 주뼛거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술이 들어가면 다들 친해질 테니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본격적인 파티 타임이 시작되자 언제 어색했냐는 듯 다들 친구가 되었다. 어제보다 부쩍 늘어난 인원이라 더욱더 신명 났다. 어제는 네 명이었다면 오늘은 뉴페이스까지 포함해서 여덟 명. 분위기도 즐거운 데다 야외에서 바비큐 파티까지 해서 더 좋았다. 날씨가 좋아서 별도 잘 보였고. 한창 즐겁게 술자리가 무르익고 있는데, 두부 오빠의 친구인 가야 오빠가 온다고 했다. 가만 생각하니 오늘 제주로 내려온다고 했었다. 고기를 좀 남겨둬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니까, 두부 오빠가 괜찮다고 다 먹으라고 했다. 안 줘도 된다고. 남자들의 우정이란 이런 건가 싶었다. 두부 오빠가 이렇게 쏘 쿨 하게 얘기하는 건 처음 봤다.



진짜로 고기를 다 먹어가는데 가야 오빠가 도착했다. 술을 마시면서 오늘 별이 잘 보이니까 용눈이 오름에 가자고 우리끼리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운전할 사람이 없다. 우린 모두 술을 마셨으니까. 그래서 가야 오빠가 오면 운전대를 맡기기로 했다. 가야 오빠는 그래서 영문도 모른 채 와서 허기만 채우고 바로 운전대를 잡았다.



열심히 운전대를 잡았는데 웬걸. 막상 용눈이에 가니 별이 안 보인다. 두 팀씩 나눠서 가기로 했는데, 선발대로 출발한 내가 용눈이에 가서 별이 안 보여서 실망하고 돌아오자 모두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어쩌겠나. 어둠만 짙게 깔린 용눈이에 가봤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아쉬움은 훌훌 털고, 숙소에서 본 별을 위안 삼으며 신나게 파티를 이어가기로 했다. 비록 용눈이에서 별은 보이지 않았어도 우리의 눈에는 각자의 별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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