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 다이어리 11 - 제주도(Jeju Island)
어느덧 제주 셋째 날. 벌써 삼일 째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왜 이렇게 이 섬에 오면 시간이 광속으로 흘러가는 걸까. 모레면 제주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오늘은 좀 느긋한 일정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식사를 위해 다 같이 교래 닭 칼국수로 갔다. 밥 먹고 삼다수 숲길이나 좀 걸을 생각이었다. 국물이 걸쭉한 게 해장에 딱이었다. 그런데 왜 다들 그릇이 비워지고 있는데, 나만 줄어들지가 않을까. 마치 테이블에 그릇이 딱 붙어서 무한리필처럼 면이 계속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아서 진짜 나만 무한리필인가 싶어서 테이블 밑을 힐끔 보았더니 다들 웃었다.
식사도 했으니 이제 걸을 차례였다. 초록 초록한 나무가 가득한 삼다수 숲길을 걸었다.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에 온 장기가 다 말끔해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삼다수 숲길 코스를 반쯤 걸었을까. 쪼리를 신은 내 발에 한계가 왔다. 더는 못 걷겠다고 절래 절래 손을 내젓고 있으니 앞서 걷던 다른 사람들도 지쳤는지 이만 돌아가자고 했다. 다음에 다시 걸을 땐 운동화를 신고 와야지. 역시 오래 걸을 때는 운동화만큼 편안한 게 없다.
돌아오는 길이 더 길게 느껴지는 삼다수 숲길을 빠져나와 우리는 각자의 일정을 시작했다. 오늘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유희와 강현이는 숙소에 가기 전에 함덕 서우봉을 구경 갔고, 나와 가야 오빠와 두부 오빠는 이호테우 해변 쪽에 현재 살고 있는 인철이 오빠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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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테우 해변에 도착하니 인철이 오빠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여기라고 외치고 있었다. 전형적인 제주 돌담 집에 인철이 오빠와 다른 사람 두 명이 함께 쉐어 하우스 개념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살아가는 모습도 제주도와 닮았고, 여행자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인철이 오빠. 오랜만에 마주했지만 예전에 보았던 모습과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더 편안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몇 달간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돈이 모이면 인도로 떠남을 반복하는 그의 삶의 방식이 나는 참 좋았다. 내가 지향하는 삶의 어느 지점과 닮아있었기에. 거실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낮술을 하면서 여행과 사람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들이 참 즐겁고 행복했다. 장을 보러 가야 해서 비록 더 길게 앉아 있지는 못했지만, 처음 보는 손님들을 친근하게 맞아준 인철이 오빠네 쉐어 하우스 식구와 제주도를 여행 중인 게하 스텝 동생도 모두 모두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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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고기를 구워 먹었으니까 오늘은 해물찜을 안주삼아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제보단 조촐하게 장을 보고, 내가 대표로 숙소 근처의 각지불에 가서 해물찜을 사 왔다. 역시 해물찜은 각지불. 그 맛은 여전했다. 어제 보다는 조용한 분위기로 파티가 이어지고 있는데, 눈사람 오빠가 나타났다. 내가 제주도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이 왔길래 얼굴이나 볼 겸 오라고 했는데 흔쾌히 내가 있는 곳까지 달려와줬다. 감동이었다. 다른 도민들은 연락하면 항상 자신의 거처로 오라고 하지, 직접 움직일 생각은 웬만해서는 안 하는데 말이다. 물론, 나도 제주에 살 때는 그런 측면이 없잖아 있었다. 변명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차가 없는 뚜벅이였던 나에게 있어서 움직인다는 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하는 날이 되어서일까. 흥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 같았다. 게다가 눈사람 오빠는 기타를 잘 친다. 그러니 노래방이 딱히 필요 없다. 오랜만에 눈사람 오빠의 기타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다른 사람들도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고, 눈사람 오빠는 묵묵히 기타를 치고 막걸리를 마셨다. 기타 선율 위에 얹어지는 생 목소리가 중산간의 공기 속으로 가득히 퍼지고, 셋째 날도 그렇게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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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았다. 오전에 일어나 유희를 데리러 종달리에 갔다. 다른 숙소에 갔던 유희가 우리와 있을 때보다 재밌지 않았는지 다시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루도 안 떨어져 있었는데, 다시 만난 유희가 어쩜 이렇게 반갑던지. 유희를 픽업하고 나니 식사 시간이어서 부농에 갔다. 부농에서 식사를 하는데, 얼큰한 국물이 필요했던 나는 많이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았다. 맛은 좋았는데, 좀체 넘어가지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바로 해장국이었으니까. 밥도 먹었으니 어딜 가볼까 고민하다가 협재에 고양이 카페가 있다고 해서 거기로 가기로 결정! 비록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멤버는 없었지만, 우린 모두 고양이를 좋아했기에 만장일치로 멀디먼 협재까지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고양이 카페에 갔더니, 귀여운 고양이들이 난로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리는 고양이를 보자마자 흐뭇한 미소를 발사했다. 아아, 언제 봐도 고양이는 옳다. 커피를 마시며 고양이를 보며 힐링하고 있는데, 시간을 보니 어느덧 저녁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한 채 카페를 나왔다. 안녕, 냥이들아. 다음에 또 보러 올게.
이왕 협재 쪽에 온 김에 월령리에 선인장 군락이나 보러 가자고 했더니 다들 콜을 외쳤다. 월령리 곳곳에 펼쳐진 선인장의 모습들이 평화롭게 느껴지는 저녁,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 시간이 오래도록 내게 머물기를 바라며 바다를 향해 작은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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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간 여러 종류의 파티를 했기에 오늘은 더 조촐하게 파티를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저녁 겸 파티가 아닌, 오늘은 식사를 하고 숙소에 들어가서 파티를 즐기기로 했다. 애월 쪽에 내가 좋아하는 돈가스집이 있어서 그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애월 쪽으로 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분명 공식 휴무날이 아니었는데, 임시 휴무라며 돈가스 집은 닫혀있었다. 뭔가 허탈한 기분이 들어서 멍 때리고 있는데,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다음 행선지로 상추 쌈밥으로 유명한 고불락 식당으로 향했다. 제발 이곳은 열려 있기를 바라며.
다행히도 고불락 식당은 열려있었고, 절묘하게도 웨이팅도 없었다. 옹기종기 앉아 상추 쌈밥을 먹는데 아아, 이것이야말로 천상의 맛. 이제까지 식사를 하면서 매번 양이 많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던 내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상추 쌈밥을 클리어했다. 내가 남기지 않고 다 먹는 모습을 본 게 처음 이어서일까. 다들 이렇게 잘 먹는 거 처음 본다며 앞으로 밥 먹으려면 상추 쌈밥을 먹어야겠다고 농담을 했다. 매끼마다 상추 쌈밥을 먹는다면 나야 대 환영이지만.
간단히 마실 술을 사들고 숙소에 갔더니, 오늘 만실이란다. 우리가 지내면서 한 명 두 명 발걸음을 붙잡으면서 늘어난 인원에 새로운 인원까지 추가돼서 마지막 날은 만실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성수기도 아닌 비수기에 만실이라니!
만실이어서일까. 각자 캐릭터가 뚜렷한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리 캐릭터가 뚜렷해도 나도 결코 지지 않는다. 머리색부터 분홍이라 튀기도 하고. 그러나 내 머리색에 대적할 만한 인물들이 둘이나 있었다. 우리 셋이 모이면 마치 신호등 같은 느낌이었다. 빨갛고 노랗고 분홍색의 머리. 한 명이 초록색이었으면 완벽한 신호등인데 아쉽다.
항상 여행 마지막 날은 최고로 재밌다. 이제까지의 날들의 흥을 다 합쳐도 모자랄듯한 흥이 곳곳에 넘쳐흘렀고, 각자의 개성을 내뿜으며 밤을 수놓았다. 개그 어벤저스라 통칭해도 좋을만한 재밌는 사람들. 덕분에 오랜만의 제주도 나들이는 마무리까지 훌륭했다. 행복한 나의 섬, 제주. 다음에 다시 발걸음 할 때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