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 다이어리 12 - 라오스 방비엥(Vang Vieng)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라오스. 사실, 건기에 라오스를 가기로 계획을 세워놨음에도 불구하고 우기에 먼저 오게 되었다. 저렴한 비행기 표가 내 마음을 붙잡았으니까. 건기에 갈 텐데 굳이 지금 가야 되나 한참을 고민했지만, 마음속에서 라오스라는 세 글자가 계속 요동치는 바람에 결국 나는 비행기 표를 지르고 말았다. 이왕 가는 거 라오스를 제대로 만끽하고 오자는 의미에서 이주짜리 일정으로 왕복표를 결제하고 나니 거짓말 같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불과 여행을 삼 주 앞둔 시점이었다. 바쁘게 지내다 보니 삼 주는 금방 흘렀고, 나는 설레는 기분으로 라오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그 나라에 드디어 간다. 시간이 느리게 움직인다는 그곳, 라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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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비행기여서 라오스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미리 신청해놓은 픽업 패키지에 따라 숙소에서 제공하는 툭툭이를 타고 공항을 벗어났다. 준비해 간 달러를 라오스 화폐인 낍으로 환전하고, 짧은 잠에 들었다. 오전 일찍 벤을 타고 방비엥으로 떠나야 하기에 말 그대로 눈을 붙일 정도의 시간밖에는 없었다. 비행기에서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해서 너무 피곤했지만 막상 자려니 잠이 오지 않았다. 여행 첫날이라는 기대감이 피로를 누르고 정신을 일깨우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자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방비엥에 도착해서 일정을 소화할 수 있으니까. 감기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닫고 나는 잠에 들었다. 빨리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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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하던 아침이 왔다. 나는 후다닥 준비를 마치고 유심부터 구입했다. 유심이 없으면 휴대폰은 그저 시간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는 도구에 불과했기에, 문명과 단절되지 않으려면 빠뜨릴 수 없는 필수템이었다. 유심을 구입하고, 한인 쉼터의 휴게실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방비엥으로 갈 시간만 기다리는데, 출발 시간이 되어도 출발할 기미가 안보였다. 결국 한 시간이나 늦게 출발했다. 라오스에 오기 전에 검색해서 보았던 글에서 라오스에는 라오스만의 라오 타임이 있다고 했다. 그 라오 타임이 여기에도 적용되는구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일정이 짧은 사람이었다면 그 한 시간도 아까웠을 테지만, 충분히 여유로운 일정으로 왔기에 라오 타임 정도는 너그러이 이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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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한 길을 거쳐 방비엥으로 가는 길, 반쯤 왔는지 휴게소에 차가 정차했고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쉬는지 몰랐기에 뭔가를 먹기에도 애매해서 과일을 말린 믹스 칩과 물을 사서 간단하게 먹으며 쉬고 있는데, 문득 날씨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방비엥과 가까워질수록 비가 더 많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휴게소에서 마치 호우주의보라도 발령된 듯이 끝없이 땅으로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제발 방비엥에 도착했을 때는 잠시라도 비가 그쳐주길 바랐다. 비 올 때 캐리어를 끄는 건 정말이지 최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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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하늘이 알아차린 걸까? 방비엥에 오니 비가 왔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맑은 하늘이 나를 반겨주었다. 가벼운 기분으로 숙소에 짐을 풀어두고, 방비엥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살 사이로 더해지는 발걸음. 걷다 보니 거리 곳곳에 이곳이 한국인지, 외국인지 헷갈릴 정도의 많은 한국어 판넬들이 방비엥 거리를 걷는 내게 손짓했다.
강렬한 햇살 덕분에 오래 걷지 못하고, 금방 기운이 빠져버렸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카페에서 원고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근처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섰다. 커피프린스. 카페의 문을 열자마자 습한 거리의 공기는 날아가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를 반겼다. 레모네이드를 시키고, 앉아서 원고를 쓰는데 정말이지 행복했다. 내가 딱 바라왔던 그림이다. 도보로 익숙하지 않은 동네 곳곳을 탐험하며 지칠 때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글을 쓰는 것. 이 도시의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고, 나도 그들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상태 또한 좋았고. 한참 동안 카페에 앉아 글을 쓰다가 힐끗 시간을 보니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낮에는 혼자여도 괜찮지만, 밤에는 누군가와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같은 비행기를 탔고, 먼저 방비엥에 넘어와있는 워니 님께 연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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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쾌히 워니 님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하고 만났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도, 비행기 안에서도, 라오스에 도착했을 때도 인사를 나누었지만 막상 방비엥에서 만나니 여러 번의 인사가 무색하게 조금은 어색했다. 그러나, 그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워니 님이 편해졌고, 우리는 서로 말을 놓았다. 워니 오빠는 라오스가 이번이 두 번째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방비엥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간단히 피자에 맥주를 먹고, 강가 쪽을 함께 거니는데 낮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강가의 야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강물에 반사되는 불빛들이 마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연상케 했다. 강가 쪽에서 간단히 맥주를 더 마실까 하다가 안주거리로 당기는 메뉴들이 없어서 강가 옆의 가게에 들어가서 먹기로 했다. 불 켜진 방갈로를 구경하며 마시는 맥주는 참 달았고, 습기 찬 공기를 다 몰아내는 느낌이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쿠라바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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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니 오빠는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사쿠라바에 가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내일 오전 짚라인 때 만나기로 하고 안녕을 고했다. 나 홀로 사람들로 북적이는 사쿠라바에 들어섰는데,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어서 끼지 못하고 야외에 나와 앉아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사람과 우연찮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패키지로 가족들과 함께 여행 온 설 언니와 재인이. 둘은 전에도 라오스에 와봤는데, 이번에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일정이어서 패키지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있는데, 때마침 금요일이었기에 정글 파티 시간이 가까워져 왔다. 두 사람은 자유 일정이 아니기에 숙소로 돌아가고, 나는 정글 파티는 사쿠라바보다 훨씬 즐겁게 즐길 수 있겠지 싶어서 정글 파티에 가기로 했다. 정글 파티를 가려면 툭툭이를 타야 했는데, 툭툭이를 기다리면서 혜영이와 혜연이라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두 동생과 친해졌다. 함께 정글 파티에 가서 즐겁게 놀기로 했다. 그렇게 잔뜩 기대감에 부푼 상태로 우리는 정글 파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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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파티는 이름처럼 정말 정글 같은 곳에 있었다. 툭툭이를 타고 숲 길 비슷한 길을 달려 도착했는데, 야외여서인지 정글의 느낌이 물씬 났다. 불을 붙인 막대기로 림보를 하는 것도 있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림보를 시도했고 성공하거나 실패했다. 나도 해볼까 했는데, 옷에 혹시나 불이 붙으면 어쩌지 하는 소심함에 차마 도전하지는 못했다. 사쿠라바보다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째 생각보다 신나지 않았다. 처지는 음악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다운되는 기분이 들었다. 신나게 정글 파티를 만끽하는 혜연이와 달리 혜영이와 나는 정글 파티를 오롯이 즐기지 못하고 관람자 모드로 들어갔다. 고픈 배도 한몫했고. 정글 파티 안에서 꼬지를 팔길래 그걸 사 먹었는데, 맛있었지만 가격이 비쌌다. 꼬지를 열 개 넘게 먹어야 그나마 허기가 가실 것 같아서 방비엥 시내의 길가에 늘어서있던 샌드위치가 생각났다. 혜영이도 나처럼 배가 고팠는지 우리는 샌드위치를 사 올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배도 고프고 재미도 못 느끼고 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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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명이 타야만 출발하는 툭툭이 덕에 겨우 겨우 사람들을 모아 툭툭이를 탔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고, 얼른 나는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의 첫 사쿠라바와 정글 파티가 이토록 재미없게 마무리될 줄은 몰랐기에 실망감이 컸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즐거웠는데. 기분이 멜랑꼴리 해졌다. 툭툭이가 방비엥의 중심가인 케이마트 앞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샌드위치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보여서 혜영이와 나는 샌드위치를 사서 반씩 나눠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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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가 케이마트 건너편이어서 몇 걸음 걷지 않아도 돼서 편한 마음으로 사 온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먹고 있는데, 혜연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숙소에 잘 들어갔다는 연락일 줄 알았는데, 이럴 수가. 오토바이가 쫒아오고 이상한 여자가 주변에 맴돌아서 아직 숙소를 가지 못했다는 연락이었다. 둘이 걱정됐다. 어디냐고 위치를 물어봤더니 내 숙소랑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래서 둘을 데리러 가기로 했다. 비가 내려 으스스해진 밤거리를 걷는데,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둘의 모습이 보였다. 하얗게 질린 둘의 모습을 보니 그대로 보내기가 신경 쓰여서 날이 밝을 때까지 내 숙소에 있다 가라고 말했다. 내 숙소는 중심가에 있어서 훨씬 안전하기도 하고. 다행히도 한국에서 챙겨 온 카드가 있었기에, 카드게임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동이 틀 때까지 계속 카드게임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희한하게도 사쿠라바와 정글 파티보다 둘과 카드게임을 하는 시간이 더 재밌었다. 여행 첫날, 기대했던 장소들은 내게 실망감을 안겨줬지만 사람만큼은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역시 여행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여행 첫날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