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 다이어리 14 - 라오스 방비엥(Vang Vieng)
짚라인을 마치고 숙소로 오니 기진맥진 상태였다. 다들 튜빙을 하러 떠났고, 나는 도저히 튜빙을 할 힘이 없어서 저녁때 만나기로 하고 숙소로 들어온 상태였다. 씻고 짚라인의 노곤함을 풀기 위해 잠시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저녁시간이었다. 튜빙을 하러 간 워니 오빠에게 연락을 했더니 ‘아직 떠내려가는 중.’이라는 답장이 왔다. 낮잠을 자기 전에도 떠내려가는 중이라고 했는데, 얼마나 오래 튜빙을 하고 있길래 아직까지도 떠내려오는 중인 걸까. 배가 너무 고파서 먼저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서 바나나 레스토랑에 가서 치킨 커리에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다들 모여서 신닷 먹으러 가기로 했으니 얼른 신닷 먹으러 오라고. 음식이 나온 지 불과 십 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직 산처럼 쌓여있던 치킨 커리를 후다닥 흡입하듯 먹어치우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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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닷 가게에 가니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아 나를 반겼다. 처음 보는 멤버도 있었다. 내가 딱 맞춰서 도착한 건지 이제 막 오더가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짚라인에 튜빙까지 하고 와서 그런지 다들 잔뜩 피곤해 보였다. 그러나 피곤함도 우리를 이길 순 없었다. 이야기꽃은 피곤함을 뚫고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마치 신닷이 구워질 때 피어오르던 연기처럼. 처음 먹어본 신닷은 얘기를 들었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한국식 삼겹살과 샤브샤브가 합쳐진 형태. 이곳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음식이라는 것 외에는 너무도 모양새가 한국적이어서 소주가 절로 떠올랐다. 다들 소주가 생각나는 눈치였지만, 소주를 먹으면 바로 뻗어버릴 것 같다고 해서 연신 비어라오만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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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닷을 먹고, 마사지를 받으러 절반은 빠져나가고 나와 이슬 언니, 영훈 오빠, 워니 오빠는 사쿠라바로 향했다. 어제는 실망감이 가득했던 사쿠라바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설레었다. 혼자였던 어제의 사쿠라바와 달리 오늘은 같이 테이블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도 있으니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쿠라바에 가니 어제 만났던 설 언니와 재인이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왕 노는 거 다 같이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우리 테이블에 설 언니와 재인이도 합류했다. 설 언니와 재인이는 내일 루앙프라방으로 떠난다고 했다. 방비엥을 떠나는 게 아쉬운 눈치였지만, 패키지로 이미 일정이 짜여져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다. 함께 비어라오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하루에 액티비티를 두 개나 한 탓일까. 이슬 언니와 영훈 오빠는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앙으로 이동해야 되기 때문에 설 언니와 재인이도 가고, 나와 워니 오빠만 자리에 남았다. 아까 먹은 신닷의 영향일까. 맥주보다 소주가 마시고 싶었다. 워니 오빠에게 간단하게 소주 한 잔 할 생각이 있냐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해서 사쿠라바 근처의 조그마한 슈퍼에서 소주를 사고, 슈퍼 앞 테이블에 앉아 소주 뚜껑을 땄다. 소주를 마시고 있자 거리의 열기를 식히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와서 항상 가지고 다니던 스피커를 꺼내 비와 어울리는 노래를 틀었다. 빗소리에 섞여 공중으로 퍼지는 노랫소리가 나를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마시는 노상 소주. 우기의 라오스가 처음으로 괜찮다고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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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처럼, 오늘도 일어나 방비엥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비엥인에 모여서 시크릿라군으로 가기로 했기에. 방비엥인에 가니 새로운 인물들이 있었다. 한 명은 놀랍게도 나의 첫 일행이 될 뻔했던 은주 언니였다. 방비엥으로 넘어올 때 오전 차를 타느라 만나지 못하고 엇갈려서 방비엥에서 보자고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어떻게든 만나게 될 인연이었나 보다. 이렇게 시크릿라군을 함께 하게 될 줄이야.
짚라인보다 훨씬 많은 인원인 열네 명의 사람들이 툭툭이를 가득 채우고, 숨겨져 있는 블루라군이라는 이름의 시크릿라군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시크릿라군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블루라군의 두 배 정도는 가야 된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현지인들이 사는 조그마한 동네를 몇 번 지나치고 나니 툭툭이가 멈춰 섰다. 시크릿라군에 도착했다. 일찍 온 덕분인지 시크릿라군에는 몇 명의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우리밖에 없었다. 마치 우리를 위해서 준비된 공간인 것 마냥 모두가 들뜬 표정으로 시크릿라군에 몸을 담갔다. 나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물이 무서웠기에 맥주나 마시며 원고나 쓸까 싶어서 짐을 맡고 앉아있기로 했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미스테이크를 저질렀다. 눈앞에 펼쳐진 천혜의 워터파크를 두고 글을 쓰려한 것이 실수였다. 글을 쓰기엔 집중이 하나도 되지 않아서, 결국 사진이나 좀 남기는 쪽으로 계획을 선회했다. 비어라오를 마시며 사진을 찍는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푸르른 에메랄드빛의 물색. 시크릿라군이라는 이름처럼 시크릿으로 남겨두고 싶은 곳이었다. 비록 겁이 나서 물에는 들어가지 못해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물놀이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나도 나름 신나는 기분을 내기 위해 빵빵하게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아름다운 풍경, 신나는 음악, 그리고 맥주까지. 행복함은 역시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장시간의 물놀이에 지친 탓인지 다들 급격히 늙은 표정으로 물 밖으로 나왔다. 열심히 물놀이를 한 덕분에 허기도 지고해서 시크릿라군의 별미인 라면을 시켰다. 아아, 라면이 이렇게 맛있었나? 난 물놀이를 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라면이 너무 맛있었다. 센스 있게 김치까지 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라면에 김치는 환상의 조합이니까. 이제까지 먹어본 라면 중에 손꼽힐 정도로 맛있게 느껴졌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어서 더 맛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라면이 시크릿라군의 별미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남았다.
라면을 먹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에 나도 물에 들어간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돌아갈 때 나만 유일하게 뽀송뽀송하게 갈 줄 알았는데 실패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용기 내서 물에 들어가 볼걸 그랬다. 그러나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 거세게 내리는 비로 인해 모든 물놀이는 중단되었으니까. 이제까지 밤마다 비가 와서 낮에는 맑을 줄 알고 방심했는데, 역시 우기는 우기였다. 방심은 금물이라는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