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 다이어리 28 - 홍콩(Hong Kong)
빽빽한 건물 숲들이 가득히 펼쳐진 홍콩에서의 아침. 어제 들렀던 맥도날드로 오전 일찍 발걸음을 옮겼다. 영화 속 여명의 모습처럼, 내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건 사진뿐이기에, 왕가위 영화 속 장면들을 찾아가며 마치 그 장면 속에 나도 존재한 것처럼 사진들을 찍고 싶었다. 이른 오전 시간이어서 그런지 맥도날드는 한산했다. 비단 맥도날드뿐만 아니라 주변이 다 한산했다. 북적이던 저녁의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은 차분한 분위기. 바쁘게만 흘러갈 것 같던 느낌의 홍콩에서 한적함을 마주하자 묘한 느낌이 들었다. 홍콩이 마냥 빠르기만 한 도시가 아니었구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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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하면, 함께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중경삼림>. 나를 진정한 영화의 매력 속으로 인도해주고, 홍콩에 대한 로망을 품게 했던 그 작품. 공교롭게도 <타락천사>를 찍은 맥도날드와 가까운 곳에 <중경삼림>의 배경지인 청킹맨션이 있었다. 청킹맨션 앞은 짝퉁 시계를 파는 외국인들로 넘쳐났다. 주 타겟층이 한국인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하나 같이 한국어로 짝퉁 시계를 홍보했다. 가만히 청킹맨션 앞에서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노란 우비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임청하가 홀연히 나타나 그들과 함께 건물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빠르게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금성무도 요란한 모습으로 등장할 것만 같이 느껴지는 청킹맨션의 풍경. 그들과 다른 시간 속을 걷고 있지만, 내 눈앞에는 그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아마, 그들이 남긴 페이지를 그대로 내가 걷고 있기에 가능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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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킹맨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볍게 아침식사를 해결하러 란퐁유엔에 갔다. 밀크티와 토스트의 맛은 기대만큼 썩 훌륭하진 않았지만, 한 끼 식사로는 손색이 없었다. 란퐁유엔의 벽면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홍콩 스타들의 앨범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장국영이 가수 활동을 할 때 라이벌이었던 알란 탐의 사진은 있는데, 정작 장국영은 없어서 아쉬웠다. 알란 탐이 있는데 장국영이 없다니. 란퐁유엔의 주인장님은 장국영보단 알란 탐을 더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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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도 채웠겠다, 다음 행선지는 큐브릭 서점이었다. 홍콩의 시네마테크인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 1층에 자리한 카페형의 작은 서점, 큐브릭. 절반은 카페, 나머지 반은 서점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워낙 작고 아기자기해서 일반적인 서점의 느낌보다는 북카페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큐브릭의 벽면에는 A부터 Z까지 영화 제목이나 감독, 그리고 키워드에 대해 적혀 있었는데 그 점이 다른 서점과 차별화된 하나의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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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는 큐브릭 서점 외에도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온갖 영화 포스터와 DVD가 가득한 기념품샵. 기념품샵에 들어서자마자 내 두 눈은 자동으로 휘둥그레 해졌다. 이곳은 천국이다. 장국영과 왕가위 덕후인 나에게 매력 그 자체로 다가오는 곳. 왕가위 영화 속 장면들을 뽑아 만든 엽서, 중경삼림을 비롯한 왕가위 영화 OST 시디와 LP판까지. 몇 해 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보고 인상 깊었던 영화 <안녕, 첫사랑>의 DVD도 있어서 구매욕을 자극했다. 마음 같아서는 다 쓸어가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군침만 삼키며 <타락천사>를 배경으로 만든 엽서와 핀란드 감독인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 포스터를 샀다. 다음에 다시 이곳에 와서 더 많은 엽서와 시디를 사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에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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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국영을 좋아한다면, 친구는 양조위를 좋아했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양조위의 단골집으로 불리는 국숫집 카우키에 갔다. 카우키는 식사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안에 들어서 양조위가 좋아한다는 메뉴를 시켰다. 카레 안심 쌀국수. 테이블 합석이 일상화되어 있는 홍콩이기에,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양조위가 나타나 합석하기를 바라는 환상도 살며시 품어보았지만, 양조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합석했다. 카레 안심 쌀국수는 쌀국수라기엔 국물 양이 작았지만, 대신 엄청난 양의 고기가 들어가 있었다. 그릇의 반이 고기로 가득 차 있는 느낌. 고기를 다 건져먹고 나니 배가 불러서 면발을 먹기엔 위장이 벅찬 느낌이라 면을 많이 남기고 나온 게 못내 아쉽다. 카우키의 쌀국수 양을 내가 너무 만만히 봤던 모양이다. 그릇이 작아 보여서 다 먹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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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른 배를 두드리며 <중경삼림> 속에서 왕비가 날마다 몰래 양조위의 집에 청소하러 갈 때 타곤 하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로 움직였다. 영화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길어 보이는 길이에 감탄하고, 여기 어디쯤이 양조위의 집이겠지라고 생각하며 에스컬레이터 옆으로 스치는 풍경들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가만히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의 움직임에 온몸을 맡기고 서 있으니 자동으로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귓가에 들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미드레벨에서 그녀가 캘리포니아를 꿈꾸었다면, 나는 이곳에서 영화 같은 장면들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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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데 스탠튼 바가 보였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에 위치한 스탠튼 바. 다양한 국적의 여행객들이 한 손에 생맥주를 들고 서서 마시는 그 장면이 어찌나 좋아 보이 던 지. 후덥지근하게 찌는 날씨여서 그런지 생맥주가 달콤하게 보이기도 했기에, 나와 친구도 그 장면 속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스탠튼 바 옆 계단에 가만히 앉아 생맥주를 마시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눌러 홍콩의 소리를 담았다. 얼마 전부터 팟캐스트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절묘하게도 이번 주제가 홍콩과 관련된 것이었기에 스탠튼 바 옆에 앉아 담는 홍콩의 소리는 더없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홍콩 사람보다 더 홍콩 사람 같이 느껴지는 왕가위 영화의 촬영 감독, 크리스토퍼 도일도 이 계단 어딘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여러 언어들을 맥주와 함께 음미하진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