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 다이어리 29 - 홍콩(Hong Kong)
가만히 앉아 맥주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스탠튼 바를 벗어나 해가 진 란콰이펑을 천천히 걷는데, 장국영과 원영의의 연기가 사랑스럽던 영화 <금지옥엽>의 배경인 프린지 클럽이 보였다. 카스텔라빵을 연상케 하는 모양의 프린지 클럽. 우연히 만난 프린지 클럽에 반가움을 느끼는 것도 잠시, 화장실 신호가 왔다. 맥도날드에 가서 급한 용무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맥도날드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머피의 법칙인가. 다른 때는 잘만 보이던 맥도날드가 이럴 때는 보이지 않다니. 절망적이었다. 점점 더 화장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은 커졌다. 얼마나 헤맸을까. 쇼핑몰 화장실이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쇼핑몰에 갔는데, 맙소사. 우리가 들어서기 5분 전에 쇼핑몰도 마감을 한 상태라 화장실은 닫혀있었다. 정처 없이 거리를 걷는데, 만다린 호텔이 보였다. 화장실이 급한 와중에도 만다린 호텔을 보자 마음 깊은 곳에서 몰려오는 애틋함이란. 만다린은 장국영의 생애 마지막 장소였기에 더욱더 애틋했다. 장국영 효과였을까. 공중 화장실을 찾았다! 친구와 내가 홍콩에 와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고르라 한다면, 난 주저 않고 화장실을 찾은 그 순간이라 말할 것이다. 그 정도로 기뻤다. 그리고, 교훈을 얻었다. 급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화장실이 보이면 무조건 다녀와야 한다는 것. 한국에서는 어딜 가든 화장실이 있어서 흔하게만 여겼는데, 홍콩은 생각보단 흔하지 않았기에 화장실의 존재에 감사하게 된 날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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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볼일을 해결하고 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고, 목이 말라왔다. 그래서 가스등 계단에 위치한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 잔 하기로 했다. 수많은 홍콩 영화 속에 등장하던 가스등 계단. 장국영이 나온 영화에도 많이 나온 터라, 그의 발걸음이 가스등 계단 곳곳에 찍혀 있을 것만 같았다. 은은하게 계단을 밝히는 가스등의 모습에 로맨틱함을 느끼며 스타벅스로 들어섰다. 스타벅스는 복고풍의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옛 홍콩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인테리어와 분위기. 현대적인 느낌이 가득한 일반적인 스타벅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왠지 기분이 좋았다. 장국영, 그가 살았던 그 시대에 나도 한 발짝 가까워진 것만 같아서. 장국영이 더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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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지고, 다시 해가 뜨면 아침이 온다. 우리의 아침도 다시 시작되었다. 어제는 란퐁유엔에서 토스트와 밀크티를 먹었다면, 오늘은 좀 더 아기자기하게 아침 식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 찰리 브라운 카페에 갔는데 찰리 브라운이라는 이름처럼 너무 귀여운 공간이었다. 입구부터 ‘나 찰리 브라운이야!’를 뽐내는 외관과 디자인. 찰리 브라운이 그려진 라떼와 식사류를 시켰는데, 보자마자 너무 귀여워서 마음을 빼앗겼다. 심쿵이란 바로 이런 것. 귀엽다. 정말 귀엽다. 키링도 판매하고 있길래, 홀린 듯이 냉큼 구입해버렸다. 이 공간의 모든 것이 내 동심을 자극한다. 마치 어릴 적 보던 스누피 만화에 찰리 브라운 친구 역으로 내가 출연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느낌이 경쾌했다.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이곳에 오면 넋을 놓게 될 거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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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브라운 카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멍 때리다 덕질을 위해 장국영의 음반이 많다는 hmv에 갔다. 장국영 팬들의 성지 중 한 곳, hmv. 마치 지금도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가수인 마냥, 장국영의 음반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는 음반을 구하기 힘들어 음원으로만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들. 그 음반들이 내게 손짓했다. 얼른 날 데려가라고. 통째로 다 사버리고 싶었으나, 홍콩 달러가 수중에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환전을 많이 해올걸 그랬다. 사고 싶은 건 많은데, 사기에는 한정된 나의 여행 경비. 가장 장국영이 아름답게 나온 자켓 사진이 있는 앨범을 고르고 부리나케 hmv를 나왔다. 오래 머물면 미련만 더 커진다. 그리고, 이건 핑계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나마 아쉬움을 남겨둬야 이곳에 다시 방문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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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줏단지 모시듯 가방 안에 장국영의 앨범을 조심히 넣어놓고, 영화 <첨밀밀>의 장소인 캔톤로드를 지나 대형 파르페 모양의 조각들이 시원하게 펼쳐져있는 1881 헤리티지에 갔다. 멀리서 보기에도 조각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이스크림 축제라도 열리는 것 같이 보였다. 땡볕에도 절대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는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 이 시간도 녹지 않고 사진 속에 영원히 봉인되길 바라지는 않을까? <중경삼림> 속에서 금성무가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정하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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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왔으니, 트램을 한 번쯤은 타봐야 했다. 장국영의 단골집인 예만방과 모정이 있는 동네 해피밸리를 찾아가기 위해 애드매럴티역에서 해피밸리행 트램을 탔다. 트램의 2층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에 앞머리를 맡기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트램이 정차할 때 뒤에서 따라오는 트램과의 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까워서, 이 트램이라는 공간에서 앞 트램과 뒤 트램에 탄 사람이 처음 만난 서로를 바라보며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첨밀밀>이 영화 속이 아닌 트램에서도 재현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 서로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거리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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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밸리에 내려 예만방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피밸리라는 지명이 행복하게 여겨지는 기분에 휩싸일 때쯤 예만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국영이 즐겨먹은 새우 딤섬의 맛을 머릿속에 그리며 문을 열려던 순간, 브레이크 타임이라는 글자가 내 눈동자 가득히 일렁였다. 타이밍 한 번 제대로다. 브레이크 타임이 시작되는 시간에 하필 예만방에 도착해버렸다. 예만방이 브레이크 타임이니, 모정부터 가야겠다 싶어서 모정에 갔는데 모정마저도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아아, 왜 둘 다 똑같은 시간에 브레이크 타임인 것 인가. 해피밸리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서기는 아쉬워서 모정 주변에 보이는 맥도날드에서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모정에서 저녁식사를 할 예정이었기에 햄버거로 배를 채우기엔 애매해서 콜라를 시켜서 마시고 있는데 모정의 입구에 걸려있던 브레이크 타임이 사라졌다. 드디어 오픈 시간이 된 것이다. 장국영이 생전에 자주 찾곤 했다는 일식집, 모정. 막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서인지 손님은 친구와 나뿐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으니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장국영이 즐겨먹었던 스페셜 메뉴가 있는 메뉴판을 가져다줬다! 딱 봐도 장국영 덕후인 게 티가 났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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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이 즐겨먹은 스페셜 메뉴와 맥주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있으니 가족단위의 손님이 모정에 들어섰다. 알고 보니 우리가 앉은자리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예약석이었다.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자리가 없어서 발길을 돌려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다림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덕후인 게 티도 난 김에, 뭔가 장국영과 함께 먹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어서 hmv에서 산 장국영 앨범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더니 그 장면이 신기했던지 모정의 직원들이 서빙을 하며 작게 웃었다.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가족 손님 중 꼬마도 자꾸 우리 쪽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 꼬마가 어찌나 귀엽던지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꼬마의 영향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도 이제 결코 어리지 않은 나이여서일까. 결혼 이야기가 나왔고, 비혼 주의자를 자처하는 내게 친구가 물었다.
“류야, 넌 만약 장국영이 살아있고 결혼하자고 하면 결혼할 거야?”
“아니. 안 할 거야.”
“왜?”
“난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만약 오빠와 결혼하게 된다면 그 우월한 유전자가 끊기게 되잖아. 그런 건 싫어. 차라리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알콩달콩하게 사는 걸 지켜볼래.”
장국영 이어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에 순간 친구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내 대답을 듣고 난 후 그 의문들은 가라앉았는지 더 이상 결혼이라는 화제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근데, 정말로 그가 살아있고 내게 결혼하자고 말을 건넸다면 나는 한참을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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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에서의 식사를 마치고, 이제는 브레이크 타임이 끝났을 예만방으로 갔다. 예만방에서 장국영이 좋아하던 새우 딤섬을 먹다가 문득 그의 입맛과 내 입맛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 장국영 입맛이 나랑 좀 비슷한 거 같아.”
“입맛이?”
“응. 완전 애 입맛이야. 음식들이 대체적으로 다 달짝지근해.”
음식들이 다 달다는 말에 동의하는지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단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장국영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연인은 되지 못해도, 최고의 단짠 음식 메이트는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음식 취향이 너무도 잘 맞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