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영화관 - 광주 (1)
광주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 바로 광주극장이다. 1935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광주극장을 보고 있노라면 고맙고, 든든한 마음이 든다. 그런 광주극장의 이야기를 담는 작업은 내게 버킷리스트와도 같은 일이었다. 이렇게 ‘내가 사랑한 영화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무척이나 기쁘다. 나는 한껏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광주극장에 들어섰고, 그렇게 오늘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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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광주극장에서 1997년부터 일하고 있는 전무이사 김형수라고 합니다.”
이사님과는 오늘의 인터뷰 전에도 한 번 뵌 적이 있었는데,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광주극장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분이라는 걸. 그러한 깊은 애정이야말로 2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를 극장에 머물게 만든 건 아닐까 싶다.
“광주극장은 1935년 10월 1일 개관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요. 2020년 현재 85살이라는 나이를 먹으며 지역민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국내 유일의 단관극장이라는 타이틀도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광주극장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광주극장이 탄생한 1935년은 일제 식민지로서 암울한 시대였어요. 전방위적으로 일본의 차별이나 식민지배로 인해 울분에 가득 찬 시기였죠. 극장이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조선 사람이 운영하는 곳을 찾기는 힘들었죠. 광주극장이 이렇게 긴 시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조선 사람이 설립하고 운영까지 함께 이루어진 호남 최초의 극장이라는 점에서 지역민들에게 버팀목과도 같은 의미여서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년 한국영화 100주년 때 광주극장의 이미지를 담아 트레일러도 만들어졌는데요. 트레일러를 보면서 광주극장에게도, 이곳에서 일을 하는 저희에게도 참 큰 의미로 다가왔어요.”
광주극장이 개관한 1935년은 일제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좌지우지되던 힘든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조선인인 최선진이 세운 광주극장은 국민들에게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규모도 1200석가량의 대극장이었고, 일본의 극장을 의미하는 ‘좌’나 ‘관’이라는 호칭 대신에 극장이라는 단어를 붙이면서 조선인이 세운 곳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지역민들은 그런 광주극장을 드나들며 숱한 어둠의 시대들을 지나왔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살아있는 근현대사와도 같은 광주극장. 광주극장이 오랜 시간 꿋꿋이 버텨주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뭉클했다.
“현재의 광주극장의 모습은 1968년 화재 이후 재개관을 하며 만들어졌는데요. 현재 862석이라는 많은 좌석이 있어서 장점도 있지만, 지정좌석제가 아닌 자유좌석제여서 관리에 대한 부분에 대한 애로사항도 많을 듯합니다. 좌석 관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1968년의 화재가 나기 전에는 1200석 정도의 규모였고, 게다가 입석까지 있었어요. 영화 산업 자체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이었고요. 극장에 상주하는 인원도 많아서 청소하는 인원도 많았고요. 관객들도 매회차 자주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좌석 관리가 이루어졌어요. 계속 많은 좌석들이 사용되다 보니 관리가 잘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관객이 들지 않게 되면 좌석도 사용이 되지 않는 게 많아서 원래의 수명보다 더 빨리 기능을 잃게 되죠. 뻑뻑해지지 않게 그만큼 기름칠도 더 많이 해야 하고요. 지금은 한 회차에 10명의 관객이 들기도 힘들어서, 좌석관리가 그만큼 더 어려워요. 그래서 동절기에는 일시적으로 1층 좌석은 사용하지 않는 걸로 하고, 2층만 개방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대로 극장 좌석을 방치해두면 청결이라던지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극장을 여는 이상 계속 좌석들을 꼼꼼히 청소하고 있어요. 극장 자체도 오래됐는데, 좌석 컨디션도 별로면 좋은 영화를 상영하고도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을 안겨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보내는 많은 시간들을 청소로 할애하고 있어요.”
현재의 광주극장의 모습은 완전한 원형 그대로는 아니다. 1968년에 극장에서 화재가 일어나서, 극장 전체가 전소되었기 때문이다. 극장이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축에 돌입해 지금의 광주극장의 모습이 되었는데, 만약 재건축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재건축을 하면서 좌석수는 처음 설립 때보다 조금 더 늘어났는데, 현재의 좌석 규모는 1997년의 리모델링을 통해 이루어졌다. 두 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커플석도 그때 처음 생겼다. 리모델링을 통해 좌석수는 축소되었지만, 점점 더 상영관별 좌석수가 줄고 있는 멀티플렉스와 비교해봐도 엄청난 숫자다. 그 많은 좌석들을 관리해나가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무언가 마음이 찡해졌다.
“광주극장에서 오래 근무하신 만큼 매진에 대한 기억도 많으실 텐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매진의 기억은 언제인가요?”
“영화가 흥행이 되어서 매진이 된 경우도 있지만, 심야상영을 처음 했을 때가 기억이 나네요. 많은 분들이 밤에 극장을 찾아주셨어요. <킹덤>을 상영했었는데요. 많은 분들이 줄을 서서 극장에 입장하던 모습들이 생생해요. 완전 매진은 아니었지만, 500여 명 정도의 관객분들이 영화를 관람하셨죠. 그 후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중계를 했었어요. 예전에는 월드컵 중계를 해주는 극장이 거의 없었어요. 영화와 중계를 함께 묶어서 상영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사실 사람들이 많이 올까 걱정이 많았는데, 입석까지 꽉꽉 들어찰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어요. 1차, 2차전 경기 때까지는 매진을 기록했는데 예선 탈락이 확정되고 난 후에는 관중이 많이 줄었죠. 극장이란 공간에서 스포츠 중계를 함께하면서 상당히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뿐만 아니라 여러 볼거리를 제공하면 더 많은 분들이 극장에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그때 그 순간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 찬 극장 안. 영화뿐만 아니라 월드컵이라는 지구촌 대 축제를 모두가 즐기며 환호하는 시간들. 지금은 월드컵 중계를 극장에서 해주는 게 흔한 일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국내 최초 월드컵 중계를 시작한 극장이 광주극장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극장에서 다른 것들도 시도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준 매력적인 사례로 다가온다.
“영화 상영을 시작할 때 종소리로 상영 시작을 알리는 게 인상 깊습니다. 이 종소리는 예전부터 쭉 이어져 내려온 전통인가요?”
“제가 처음 일을 했을 때도 종소리로 영화 시작을 알리는 시스템이었어요. 1997년에 영사기와 좌석을 교체하는 작업을 하면서 종소리도 지금의 종소리로 바꾸었는데요. 묵직하면서도 잔향이 남는 느낌의 종소리를 찾기 위해 여러 종소리를 들어봤죠. 그러다가 현재의 종소리를 찾았고, 계속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원래는 영화 시작 5분 전에 종을 한 번 치고, 상영이 시작될 때 또 한 번을 쳤는데 종소리를 녹음한 테이프가 많이 늘어져서 지금은 상영 시작 시간에만 한 번 치는 걸로 바꾸었습니다.”
상영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는 광주극장의 트레이드 마크다. 아날로그적인 종소리를 들으며, 이제 시작시간이 다 되었구나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영화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종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관람하는 색다른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언제든지 광주극장으로 오면 된다. 매 회차 당신의 입장을 기다리는 종소리가 극장 가득 울려 퍼지고 있으니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극장이니만큼 검열을 하기 위한 임검석이 있습니다. 임검석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많을 텐데,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가 있나요?”
“임검석은 시대에 따른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임검석이라는 공간이 누군가를 감시하고 검열하기 위한 곳이니만큼,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순사들이 항일에 관한 내용이 무대에 오르지 않게 지켜보는 곳이었죠. 예전에는 극장 무대에서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연설, 집회, 극들도 많이 했으니까요. 7~80년대에는 선생님들이 학생을 선도하는 공간으로 임검석이 활용되기도 했어요. 학교를 빼먹고 극장에 오거나,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오는 학생들을 잡아내는 역할로 임검석이 이용되었죠. 영화가 시작되면 극장 안이 어두워지는데, 선생님들은 그 어둠 속에서도 뒷모습만으로도 학생들을 귀신같이 알아챘어요. 그렇게 학생들을 잡아내서 기합도 주고 그랬다고 해요. 1968년 화재가 나면서 임검석을 없애자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임검석은 광주극장의 역사이자 시대의 상흔이 존재하는 공간이기에 없애지 않고 유지하기로 했죠. 지금 젊은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요즈음도 임검석에서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관객분들이 종종 계셔서 볼 수 있게 해드리고 있어요. 임검석 같은 경우는 암막이 확실하지 않아서, 관람하는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 조건으로 하고요. 관람을 하다가 밖으로 나오면 빛이 상영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거든요.”
일제 강점기 무렵에는 순사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임검석은 시대가 변하며 일종의 VIP석 개념으로 선생님들에게 제공되었다. 임검석은 일반 좌석과는 다른 독립된 공간으로 존재하니까. 언제든 선생님이 극장에 오면 앉을 수 있는 자리, 임검석. 영화도 보고, 학생들 선도도 한다는 점에서 선생님들에게는 임검석이 일타이피와 같은 공간이 아니었을까.
“광주극장 하면 극장 앞에 걸린 손 그림 영화 간판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예전에는 박태규 화백님만 그림을 그리셨지만, 지금은 시민들이 영화간판 학교를 통해서 함께 간판들을 그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화간판 학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박태규 화백님께서 본인의 대에서 간판 작업이 끝나지 않고, 광주극장이 이어지는 한 계속해나가고 싶다는 의미에서 광주 시민들과 함께 간판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영화간판 학교였죠. 처음 간판 학교를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많이 와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참여하러 와주셨어요. 그 모습을 보고 영화 간판이 극장에 있어서 참 큰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광주극장에서 본 영화를 조각보처럼 관객들이 간판에 직접 그리고, 박태규 화백님이 지도를 해주는 과정을 거치면서 영화간판 학교가 4기까지 진행됐어요. 매 기수별로 새로운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간판 학교 커뮤니티도 활발해지는 걸 보면서 뿌듯했어요. 그리고 매년 광주극장 개관 영화제에 시민들이 그렸던 간판들을 개막작으로 올리기도 하고 있어요. 일종의 개막식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죠. 일 년 중 딱 하루지만, 저희에게는 매년 가장 기다려지는 날 중 하나예요. 간판을 올리면서, 시민들과 또 한 살을 먹었구나 하는 생각에 힘이 되곤 해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영화간판 학교를 계속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광주극장에는 트레이드 마크가 많다. 상영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임검석, 그리고 영화간판. 손 간판이 모두 사라진 시대에 광주극장의 영화 손간판은 옛 극장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자극제다. 나는 광주극장에 올 때마다 꼭 영화 간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좋아하는 영화들이 그림으로 담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다. 오랜 시간이어온 공간만큼, 영화 간판도 앞으로도 오랜 시간 이어지며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모습으로 자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본다.
“어느 인터뷰에서 “관객이 많이 와서 떼돈을 벌기보다 여태껏 해온 것처럼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고, 극장의 한 세기를 지켜주셨던 관객들과 함께 새로운 100년의 시간을 맞이하고 싶다.”라고 얘기하신 게 마음에 깊게 와 닿았는데요. 많은 예술영화관들이 어려운 시대에, 앞으로의 세기를 잘 버텨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광주극장뿐만 아니라 각도시마다 예술영화 전용관들이 있는데, 그 공간들이 존재할 수 있는 건 운영하시는 분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 노력에서 어떠한 노력들을 더해야 하는지는 고민이 되는 문제네요. 극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계속 잘해나가는 것도 일종의 노력이죠. 그리고 영화산업이 점점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후에도 많은 스크린들이 존재할지도 알 수 없고요. 나중에는 스크린이 테마파크화 되진 않을까 싶기도 해요. 영화산업 자체가 바뀐다면 노력하는 자체로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변화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들, 변화에 맞춰나가야 할 부분들은 최대한 발맞추어 가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걱정과 불안한 마음은 해소되지 않죠. 그렇기에 찾아주는 관객 개개인의 움직임이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전통적인 세대들은 극장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요즈음의 젊은 세대들은 영화 외적인 부분들도 많이 보기 때문에 앞으로의 상황을 낙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광주극장이라면 지금의 이 힘든 시기들도 충분히 잘 헤쳐나갈 거라고 믿는다. 이제까지 수 없이 힘든 상황들을 버텨냈듯이 앞으로도 분명히 잘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던하게 노력해도 관객이 찾지 않으면 영화관은 존재할 수 없다. 관객이 걸음함으로써 영화관은 돌아간다. 영화관이 노력하는 만큼, 관객도 직접적인 발걸음으로 영화관을 도와주어야 한다.
“광주극장의 스크린 크기는 유스퀘어에 CGV IMAX가 들어서기 전에는 호남 최대의 크기였다고 들었습니다. 큰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장점이 많을 텐데요. 어떤 장점들이 있을까요?”
“예전에는 극장들이 단독 건물이다 보니 건물 크기에 맞는 스크린들을 보유하고 있었죠. 그러다 보니 스크린 사이즈가 극장의 자랑이기도 했고요. 광주극장 건물 크기에 맞는 사이즈의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다는 게 저희에게도 장점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예술적인 미학을 자랑하는 영화들을 상영할 때 큰 스크린을 통해서 봄으로써, 영화를 원래와 가깝게 체험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스크린이 큰 만큼 사운드들도 훨씬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것도 좋은 점이에요.”
큰 규모만큼이나 스크린의 크기도 시원해서, 광주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화면에 홀리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는다. 마치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 그 느낌은 관람객에게 제공되는 최고의 무형 서비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