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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Oct 10. 2023

있는 그대로 꽃을 바라보고 지켜주는 사람

기억의 단상 2020년 9월호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던 어느 일요일, 후배 하와 함께 교대역 근처에서 만나 냉면을 먹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오픈 시간에 맞춰갔음에도 냉면집에는 줄이 길어서 웨이팅을 해야만 했다. 웨이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냉면이어서 기다릴 수 있었다. 냉면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니까. 입장 순서를 기다리며 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하가 갑자기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거 제가 쓴 논문인데, 라면 받침대로 쓰세요.”     


 쿨한 말투로 말하고 있지만,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하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살포시 웃었다. 집에 가서 꼭 읽어보겠다고 했더니, 하는 절대 읽지 말라고 라면 받침대로 쓰라고 준거라는 말을 강조했다.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아직도 나는 하의 논문을 라면 먹을 때 사용한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받아본 논문 선물은 그 어떤 선물보다 감동적이었고, 하가 많은 시간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써 내려간 문장들을 생각하니 벅찬 느낌까지 드니까.     


*     


 긴 시간을 웨이팅 해서 먹은 냉면은 정말 시원했다. 냉면과 곁들여 마셨던 술의 맛은 그저 그랬지만. 냉면으로 온몸을 시원하게 만든 후,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하기로 했다. 천천히 느린 보폭으로 걷는데 어느 담벼락에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어서 하에게 사진을 찍어 줄 테니 서보라고 했다. 하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장미 앞에 섰고, 나는 그런 하의 모습을 화면 가득 담았다. 사진을 찍고 난 후 장미를 구경하고 있는데, 하가 말했다.     


“언니는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꺾는 게 아닌,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지켜주는 사람 같아요.”

“꺾으면 나만 볼 수 있잖아. 차라리 이 아름다운 걸 그대로 두고, 계속 보는 게 낫지.”     


 내 대답에 하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가 진행하는 공간 프로젝트와 그 모습이 닮았다고 했다. 혼자만 좋은 곳을 알 수도 있는데, 글로써 공간들을 알리는 모습이 닮아 보였나 보다. 하의 그 말이 집으로 가는 길에도 한참 동안 뇌리에 남았다.      


 앞으로도 아름다운 꽃 같은 공간들을 바라보고 지켜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함부로 꺾을 수 없게, 생명력이 지속될 수 있게 지켜주고 싶다는 다짐과 함께 나른한 일요일 오후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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