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단상 2020년 9월호
<샬라!>가 상영될 하늘연극장 앞에 브루니 감독이 있었고, 라지 감독은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더니 나를 소개했다. 이탈리아 영화팬이라고. 그의 말에 브루니 감독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반갑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브루니 감독과 악수한 후,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는 혼잡할 테니 미리 사인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샬라!>의 티켓을 꺼내 들었다.
브루니 감독은 친절하게 사인을 해주었고, 나는 친절한 브루니 감독에게 무엇이라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도 내 가방에는 딱히 뭐가 없었다. 사탕뿐이었다. 그래서 사탕을 꺼내어 그에게 주었다. 브루니 감독은 귀엽다는 듯 웃으며 사탕을 받아 들고는 고맙다고 말하며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정말 영화를 보기 위해 입장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와 라지 감독, 브루니 감독 셋은 나란히 하늘연극장에 입장했다. 자리는 비록 제각기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참 따뜻했다. 물론, <샬라!>도 너무 좋았고.
<샬라!> 상영이 끝난 후, 브루니 감독의 GV가 있었는데 맨 앞줄에 앉아서일까. 무대에 선 브루니 감독이 나를 발견하고,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씨익 웃으며 흔들었다. 개구쟁이 같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는데, 찰나의 순간이었던지라 아쉽게도 사진을 찍지 못한 게 아쉽다. 기념으로 남기게 찍었어야 하는데. 셋이서도 찍었어야 했고.
GV는 화기애애했고, 재미있었다. GV가 끝난 후, 사람들이 브루니 감독에게 줄을 서서 사인을 받는 모습을 보며 나는 미리 사인을 받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안 그랬으면 한참 동안 나는 줄을 섰어야 했을 테다. 내 자리는 입구와 제일 먼 자리였으니까.
영화를 관람하고 나온 라지 감독이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그에게 화답하듯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라지 감독이 내게 말했다. 오늘 밤 이탈리아 영화인의 밤 행사가 있는데, 혹시 올 생각이 있느냐고. 뜻밖의 초대에 깜짝 놀랐다. 나는 이탈리아 영화인이 아니니까. 생각이 있으면 행사에 오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
지금은 왜 가지 않았을까 후회된다. 그 자리에 갔으면 더 많은 이탈리아 영화인들을 만났을 텐데. 이탈리아 영화인의 밤 행사에는 가지 않았지만, 연락을 위해서 라지 감독의 메일주소를 받았다. 나는 여기서 또 후회하고 만다. 왜 곧장 메일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고. 메일 주소가 적힌 종이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려서 나는 그에게 메일을 보낼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듯했다.
그러나 나는 꽤 끈기 있는 사람이었고, 거의 10년이 다되어 가는 시점에서 갑자기 라지 감독에게 메일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라지 감독의 메일을 찾을 수가 없기에, 대신 <평화유지작전>을 만든 제작사에 메일을 보냈다.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라지 감독에게 메일 주소를 받았는데, 메일주소가 사라져서 그에게 메일을 보낼 수가 없어서 낙담하고 있다고. 메일주소를 안다면 알려달라고. 아직 제작사는 답장이 없지만, 만약 답장이 온다면 나는 바로 라지 감독에게 메일을 쓸 것이다. 나를 기억하느냐고. 나는 당신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고. 비록 현재 한국에서 당신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경로는 없지만, 활동하고 있는 모습들을 웹에서 찾아보며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고.
한국 넷플릭스에도 당신이 연출한 썸머타임이 서비스된다면, 꼭 보고 싶다고. 아마 라지 감독은 내가 누구인지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를 잊지 않고 있다. 매년 영화제에서 이탈리아 영화를 볼 때마다 그를 생각한다. 아마 앞으로도 이탈리아 영화를 볼 때면, 그를 떠올릴 것이다. 그와 나눴던 많은 이야기들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