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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Oct 28. 2023

Missione di pace 上

기억의 단상 2020년 9월호

 

 가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부산국제영화제다. 매년 10월마다 나는 부산국제영화제에 갔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내게 있어 하나의 계절이었고, 가을의 낙이었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영화제에 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진다. 9월 중순쯤에는 영화제에서 상영될 영화의 라인업들이 정해진다. 라인업이 정해지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건 각 섹션마다 어떤 영화가 초청되었는지 살펴보며 관심 있는 영화들의 리스트를 짜는 일이다.      


 리스트를 촘촘하게 짜놓고, 상영시간표가 발표되면 갈 수 있는 날에 맞추어 나만의 시간표를 짠다. 시간표를 짜면서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다음 영화를 보러 이동할 때 걸리는 시간과 동선은 어떤지도 계산하고. 만약 보려는 영화에 GV가 있다면 시간을 넉넉하게 짜야한다.      


 그 해도 그랬다. 어김없이 여러 가지를 고려해 시간표를 짰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지금처럼 주말만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닌, 부산에 살았기에 매일 갈 수 있었다는 것.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밤에 집에 들어갔다. 하루 종일 몇 캔의 핫식스를 계속 들이키며 내내 영화를 봤다.    

  

 하나의 루틴처럼 자리 잡은 핫식스 캔을 손에 쥐고, 나는 센텀시티 CGV 로비에 앉아 후루룩 핫식스를 마셨다. 이제 잠시 후면, 이탈리아 영화 <평화유지작전>이 시작될 터였다. 얼른 마시고 입장해야 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입안에 탈탈 핫식스를 털어 넣고 후다닥 화장실을 다녀와 상영관에 들어섰다.     


*     


 <평화유지작전>은 내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첫 장편 연출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련했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인 프란체스코 라지 감독의 GV가 있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GV의 내용이 정확하게 생각이 나진 않지만, 라지 감독이 말을 할 때마다 열심히 경청하며 들었던 기억이 난다.      


 GV가 끝나고 몇몇 사람들이 라지 감독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나 또한 영화 티켓을 들고 줄을 섰다.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그가 사인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한 마디를 하긴 했다. 그라찌에.      


 내 말에 라지 감독은 동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은 땡큐라고 말했는데, 나 혼자 이탈리아어로 고맙다고 말했으니까. 갑자기 그에게 뭔가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을 뒤적이니 가방에는 사탕과 껌 한 통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한국 사탕과 껌이라고 말하며, 가방에서 주섬 주섬 꺼낸 것들을 쥐어주었다.      


 이번엔 그가 말했다. 그라찌에. 그의 그라찌에에 천만에요라고 말하고 나는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의아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더니 라지 감독이 싱긋 웃으며 서 있었다. 라지 감독은 이탈리아 껌이라고 말하며 내 손에 껌을 한통 쥐어주었다.

      

 내가 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던 것처럼, 그도 나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던 걸까. 마음이 뭉클했다. 나는 연신 정말 고맙다고 말했고, 그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가 내게 준 껌을 생각하며, 행복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껌을 받으면서 이렇게 행복해본 건 처음이었다. 그 껌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용기를 내어 씹었다. 먹기 아까웠다. 해외 영화감독에게 받은 첫 선물이었으니까. 나는 껌을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고, 매일 바라보았다.


*


 껌을 주고받은 다음 날이었나, 그다음 날이었나. 영화의 전당 야외광장을 걷다가 광장에 놓여진 의자에 홀로 앉아있는 라지 감독을 보았다. 무슨 용기가 났던 걸까. 그에게 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서 말을 걸기는 좀 그래서, 커피를 샀다.      


 양손에 커피를 쥐고 나는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그의 앞에 비어 있는 의자에 앉으며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지나가다가 여기에 있는 걸 봤는데, 같이 커피 마시며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그 말을 하면서 얼마나 내가 속으로 긴장했는지, 아마 그는 모르겠지. 나를 본 라지 감독은 환하게 웃으며 절친한 친구를 만난 것 마냥 잔뜩 반겨주었다.      


 커피를 마시며 나는 그에게 그의 작품이 너무 좋았노라고 말했고, 그런 내 말에 라지 감독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첫 장편이라는 사실에 놀랐다는 말을 덧붙이자 라지 감독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넘실거렸다. 그의 작품에 대한 칭찬들을 하면서 자연스레 나는 이탈리아 영화를 좋아한다고, 특히 네오리얼리즘의 정신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라지 감독은 내게 좋아하는 감독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로셀리니의 작품 중에서 스트롬볼리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이야기도 함께. 내 말을 들으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라지 감독은 자신도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을 좋아한다며 특히 비토리오 데 시카를 좋아한다고, 그의 작품 중에서 <자전거 도둑>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감독이어서 더 그렇겠지만, 그가 네오리얼리즘을 좋아하고 명확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을 꼽는 그 모습이 좋았다. 네오리얼리즘이라는 뿌리와 함께 성장해 온 이탈리아 영화, 그리고 차세대 이탈리아 영화계를 이끌어갈 감독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도 물론 좋았다. 영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그날, 야외광장 의자에 앉아 우리는 나누었다.      


 한참 대화를 하다 보니, 영화를 보러 갈 시간이 되었다. 나는 라지 감독에게 아쉽지만, 이제 영화를 보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라지 감독은 자신도 영화를 보러 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곤 나에게 무슨 영화를 보냐고 물었다. 나는 <샬라!>라는 이탈리아 영화를 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내 말에 라지 감독은 자신도 그 영화를 볼 거라고, <샬라!>를 연출한 브루니 감독과 친하다고 말했다. 아직 상영시작 시간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았으니, 브루니 감독을 소개시켜주겠다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라지 감독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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