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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Oct 24. 2023

릴레이 알람

기억의 단상 2020년 9월호

 

 대학 시절, 동기가 뜬금없이 다이어트를 위해 배드민턴을 새벽마다 치겠다고 선포해 왔다. 동기의 선포에 혼자서는 배드민턴을 못 치니까, 내가 같이 쳐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학교 앞 홈플러스에 가서 배드민턴 채와 야광 셔틀콕을 샀다. 일반 셔틀콕이 아닌 야광으로 산 이유는 새벽이라 셔틀콕이 잘 안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배드민턴 선수 이용대 덕질을 했던지라, 마음 같아서는 배드민턴 채를 그가 광고하는 요넥스에서 사고 싶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가난한 학생에게 요넥스는 크나큰 사치여서 홈플러스에서 제일 저렴한 채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배드민턴 채와 셔틀콕을 사고, 다음 날부터 바로 배드민턴을 치기로 했다.     


*     


 새벽 다섯 시, 미친 듯이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군가 했더니 동기였다. 배드민턴 치기로 한 거 잊지 말라고, 얼른 일어나서 공원으로 나오라고 했다. 아니, 새벽에 만나서 치기로 했지만 다섯 시는 너무 하잖아.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공원으로 나갔다.      


 전화까지 해서 알람처럼 날 깨우던 동기는 괘씸하게도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동기에게 전화를 거니 오고 있는 중이란다. 머릿속에 요놈 봐라? 하는 생각이 스치고, 오늘 나를 새벽 다섯 시에 깨웠으니 내일은 내가 널 더 일찍 깨워주마 하는 생각으로 새벽 네 시 반에 알람을 맞춰놓았다.      


*     


 다음 날, 알람 소리에 맞춰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났다. 잠에서 깨자마자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기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몇 시냐고 물었다. 나는 네 시 반이라고 답했고, 먼저 공원 나가 있을 테니까 빨리 오라는 멘트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땐 몰랐다. 나의 이런 행동이 후폭풍을 불러올 줄은.     


*     


 전 날 네 시 반에 깨워서 잔뜩 벼르고 있던 동기는 새벽 네 시에 나를 깨웠다. 아, 진짜 열받는다. 이상하게도 오기가 생겨서, 나는 세시 반으로 알람을 설정했다. 다음 날 세시 반에 깬 동기는 노발대발했고, 우리는 잔뜩 대치 상태로 배드민턴을 쳤다. 배드민턴을 치면서 생각했다. 야광 셔틀콕을 사길 잘했다고. 우리는 며칠째 해도 뜨기 전인 새벽에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일찍 깨서 예민해져 있는데, 배드민턴까지 나한테 진 동기는 내기로 걸었던 국밥까지 사야 했다. 국밥을 먹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늘 새벽 세시 반에 깨웠으니, 내일은 얘가 세시에 나한테 전화를 할 거라는 생각. 그 생각을 하자 망했다 싶었다. 이런 사이클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두시 반, 두시, 한시 반, 한 시로 이어질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해 없이 배드민턴을 쳐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될 거였다. 아득해졌다. 나는 동기에게 이제 그만하자고, 시간을 정해놓고 치자고 했다.      


 동기는 지친 표정으로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다음 날부터 우리는 새벽 여섯 시에 배드민턴을 쳤다. 이렇게 릴레이 알람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동기는 아주 중요한 걸 망각하고 있었다. 분명히 다이어트를 위해 배드민턴을 치기로 했다는 걸. 매번 간식이나 아침을 걸고 배드민턴을 쳐서 결국 나중에는 배드민턴을 치는 의미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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