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류 Oct 17. 2023

전역

기억의 단상 2020년 9월호

 

 예전에 만나던 나의 터키 애인은 한국어를 잘했다. 딱 하나, 저녁만 빼고. 터키는 항상 저녁을 전역으로 발음하곤 했다. 처음에는 몇 번 ‘전역’이 아닌 ‘저녁’이라고 발음을 고쳐주기도 했지만, 그게 반복되자 나는 발음 고쳐주기를 포기했다. 전역이라고 해도 이제는 어차피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니까. 어느 오후, 터키에게서 문자가 왔다.     


「석류! 전역으로 국밥 먹자.」     


 아, 전역. 말로 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문자로 전역을 마주하고 있자니, 웃기기도 하고 약간의 멘붕이 오기도 했다. 한순간에 고무신이 된 느낌. 이 메시지 속 전역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저녁으로 국밥을 먹자는 게 아닌 ‘전역 기념 국밥.’ 같이 보여서 나는 문자를 보며 허허 웃었다.      


 아무튼, 그날 저녁 전역(?)한 터키를 만나 국밥을 먹었다. 국밥을 먹으며, 나는 내 맞은편에 앉은 터키를 바라보았다. 조잘조잘 떠들며 국밥을 먹는 이 사람은 대체 한국인인가 터키인인가 헷갈렸다. 전역이라는 글자만 놓고 보면 군인 같기도 하고. 국밥을 한국인인 나보다 더 좋아하는 걸 보면, 한국인 같기도 한데 얼굴을 보면 터키인이고.      


 터키는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국밥 그릇을 비워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터키는 계속 문자에 전역이라고 썼고, 나는 그때마다 얘는 대체 몇 번이나 군대를 갔으며, 몇 번이나 제대를 한 것인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분명히, 내가 저녁이라고 메시지를 고쳐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나는 터키와 헤어질 때까지 강제 고무신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흐트러진 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