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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Dec 25. 2023

혜언니 下

기억의 단상 2020년 10월호

 

 오늘도 어김없이 해운대에서 혜언니를 만났다. 며칠 동안 보다 보니 이제는 만나지 않는 게 어색할 지경이었다. 오늘 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조금은 개인적인 이야기로 대화가 옮겨졌다.     

 

 혜언니는 전주국제영화제 자원봉사를 하고 싶은데, 자신이 나이가 많아서 신청하기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일단 해보고 싶으면 신청해 보라고 했다. 그런 내 말에 혜언니는 멋쩍은 듯 웃었지만,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혜언니에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이번에는 혜언니가 내게 말했다. 넌 분명 잘할 거라고. 이렇게 영화를 사랑하고, 잘 아니까 좋은 영화를 만들 거라고 했다. 사실, 혜언니가 말을 꺼낼 때처럼 나도 조금은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용기의 말들을 핑퐁처럼 주고받았다. 그 당시에 나는 짧은 단편 시나리오를 몇 편 쓰기도 했는데 그것들을 연작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아무런 용기가 없었다. 그런 내게 있어 혜언니의 말들은 큰 힘이 되었다. 비록 영화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용기를 북돋아 주는 혜언니의 말들이 내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언젠가는 내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망이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혜언니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언니에게도 용기의 말이 필요했을 것이고, 타이밍이 맞게도 내가 그 역할을 했다. 영화제가 끝난 후, 혜언니가 보내온 편지에서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언니는 전주국제영화제 자원봉사를 신청했으니까. 고민을 행동으로 옮긴 혜언니는 어쩌면 나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느덧 영화제도 마지막 날이었다. 혜언니와 나는 해운대 그랜드 호텔 뒤에 위치한 오뎅 미나미라는 이름의 오뎅바에 갔다. 따뜻한 오뎅 국물과 정종을 사이에 놓고, 영화제가 끝남을 아쉬워하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영화제가 끝났기에, 우리의 만남도 이제 끝이 날 터였다. 내년 영화제에나 만날 수 있을까. 아쉬웠다. 매일 밤 혜언니와 마주 앉아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정말 큰 즐거움이었으니까.      


 혜언니는 전주로 돌아가기 싫다고 했다. 영화제가 너무 빨리 끝난 거 같아서 아쉽다는 말을 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영화제가 짧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혜언니는 내년에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나는 내년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의 영화제는 막을 내렸고, 일상으로 돌아간 혜언니와 나는 간간히 문자와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지금은 문자와 편지도 끊긴 지 오래지만, 종종 영화의 전당에 갈 때면 혜언니를 떠올리곤 한다. 다음 해에 우연히 영화제 티켓 발권 부스에서 마주쳤을 때 반가워하며 혜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영화제에 왔으니, 널 만나게 될 줄 알았어.”      


 혜언니를 처음 알았던 그때의 영화제, 그리고 다음 해에 우연히 우리가 마주쳤던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비록 지금은 연락이 끊겨 안부를 알 수 없지만, 나는 믿는다. 언젠가 우리는 또 마주칠 것이라고. 우리의 모든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하나의 인연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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