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단상 2020년 10월호
엄마가 만들어준 정갈한 우동들을 오랜 시간 맛볼 수 있기를 바랐지만, IMF가 닥치고 치솟는 재료값을 감당하지 못한 엄마는 우동집을 접었다. 엄마가 우동집을 접어서 단골로 오던 대학생들이 엄청 안타까워했었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그 시절, 엄마의 우동집은 단순히 우동이라는 음식을 판매하는 가게 이상이었다. 일본에 온 듯한 기분을 안겨주는 인테리어를 비롯해 식기마저도 일본식이었으니까. 쉽게 여행을 갈 수 없던 이들에게 엄마의 우동집은 우동이라는 음식을 통해 짧은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한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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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집을 접은 후, 같은 자리에 엄마는 호프집을 오픈했다. 호프집을 오픈하고 난 뒤에 나는 더 이상 가게와 집으로 연결되는 그 문을 드나들 수 없었다. 어려워진 사정 탓에 할머니 집에 함께 살게 되었으니까. 다행히도 할머니 집은 엄마의 가게 근처여서 나는 종종 오픈전의 가게에 가서 엄마가 틀어놓은 가요들을 들었다. 우동집을 할 때는 잔잔한 느낌의 노래들이 주로 나왔는데, 호프집으로 바뀌니 트는 노래도 달라졌다. 신나는 가요나 팝송이 주였다.
디바의 왜불러, S.E.S., 젝스키스, 신화, 쿨 노래가 흘러나오던 게 또렷이 기억난다. 지금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연결해서 노래를 틀던 때가 아니어서 CD를 넣고 노래를 틀면 매장 가득 노래가 울려 퍼졌는데, 엄마가 CD를 모아놓은 상자를 보며 “엄마, 젝스키스도 있는데 왜 H.O.T. 노래는 없어?”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엄마는 H.O.T. 보다 젝스키스 노래가 더 신난다고 했다. 그런 엄마의 대답을 들으며 서운했다.
나는 야금야금 어른들이 귀엽다고 준 용돈을 모아 친한 친구네 부모님이 운영하는 레코드점에 가서 H.O.T. 테이프를 살 정도로 H.O.T. 를 좋아하던 꼬마였으니까. H.O.T. 를 좋아하던 나와 달리 젝스키스의 노래를 더 좋아하는 엄마를 보며 일종의 배신감도 들었던 것 같다. 그 시절 H.O.T. 와 젝스키스는 연일 언론에서 라이벌 구도를 조성했고, 라이벌 구도 때문인지 팬들 사이에서도 서로 자기네 가수가 최고라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자식인 내가 H.O.T. 를 좋아하는데, 엄마는 젝스키스의 노래를 듣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러나 웃기게도 아이러니를 느끼면서도 나는 열심히 가게에 드나들었다. 할머니도 식당을 운영해 낮 시간에 집에 누군가 있는 일은 드물었기에, 가게에 가 있으면 심심함은 덜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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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집에 오던 단골들이 호프집에도 발걸음 하고, 입소문도 퍼져서 나름대로 호프집은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였다. 점점 더 가게가 바빠지자 엄마 혼자서 요리와 서빙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아르바이트생을 썼는데, 그 아르바이트생이 사고를 쳤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벌어진다더니, 모든 게 한 순간에 일어났다. 아르바이트생이 민증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미성년자를 들인 것이다.
하필 그날 불시 단속까지 겹쳐서 과태료와 영업 정지를 먹었다. 자영업자에게 영업 정지는 엄청난 타격이다. 하루 이틀 쉬는 것도 걱정스러운데(심지어 그때는 IMF 시대라 더 심했다), 영업 정지라니. 정확하게는 기억 안 나지만 꽤 영업 정지 기간이 길었던 것 같다. 결국 그게 시발점이 되어 호프집을 폐업하게 되었으니까. 그 아르바이트생이 민증 검사를 제대로 했다면 엄마는 더 오래 호프집을 이어갔겠지 싶어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가 밉게 느껴진다. 그 이후 한동안 엄마는 가게를 하지 않았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가게를 하긴 했지만, 더 이상 음식점은 하지 않았는데 아마 그때의 기억이 크게 영향을 미친 건 아닌가 싶다. 지금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그 모든 순간들과 맛.
언제 버스를 기다리며 터미널에서 즉석 우동을 먹다가 엄마에게 엄마가 해준 우동 맛이 그립다는 연락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말에 뿌듯해하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앞으로도 계속 그 맛을 그리워하며, 나는 우동을 먹을 때마다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그 시절 내게 있어서 엄마의 우동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