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단상 2020년 11월호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남녀공학으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 여중에 다녔다. 내가 다니던 여중에는 점심시간마다 방송부에서 주최하는 ‘뽐내기’라는 이름의 노래대회가 있었다. 신청자가 방송부에 찾아가 오디션을 보고, 방송부원들의 회의를 통해 오디션에 통과한 사람에 한해 매주 한 번 점심시간에 방송부에서 원하는 선곡으로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램이었다.
장원이라는 타이틀로 그 주 우승을 하면, 우승자에게는 문화상품권이 주어졌다. 참가자에게는 주전부리 같은 걸 줬던 기억이 난다. 나는 거의 매주 뽐내기에 참여하곤 했는데, 처음에는 장원을 하면 상품권을 준다는 말에 혹해서 재미 삼아 참여했다가 나중에는 오기가 생겨서 될 때까지 하겠다는 심정으로 참여했었다. 끈질기게 매주 참여하는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장원을 줄 법도 했지만, 좀처럼 방송부원들은 나에게 장원의 영광을 안겨주지 않았다.
매주 방송부에서 노래를 부르다 보니 목소리가 지문이라도 된 듯이 자연스레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얼굴을 모름에도 특이한 이름 때문에 다들 나를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아마 명찰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명찰을 달지 않았다면, 내가 매주 뽐내기에 나가는 애인지도 몰랐을 거다. 어디서 많이들은 목소리라는 생각은 했겠지만.
어느 날, 비 오는 하교 길에 우산을 쓰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는데 우산 하나가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너 석류 맞지?”
석류가 맞냐는 물음에 나는 맞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 우산은 “점심시간마다 노래 잘 듣고 있어.”라는 말을 약간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남기고는 먼저 교문 밖을 나섰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아직도 선명하다. 우산 아래로 보이던 명찰은 나와 다른 색이었다. 학년마다 명찰의 색이 달랐기에, 나와 다른 색이라는 건 선배라는 소리였다. 뜻밖의 응원에 고맙기도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조금은 벙 찐 상태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직접적으로 내게 응원을 건네준 건 처음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고마웠다. 그때 그 선배의 응원은 내가 포기하지 않고 장원까지 완주할 수 있게 한 하나의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