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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 myself Feb 15. 2024

1.어른이 되었다 생각한 소녀

#1. 꺼져가는 등불

8남매 맏이인 아빠에 셋째 딸로 태어난 나는 동생을 보기 전까지는 심한 구박데기로 살아왔지만, 불굴의 의지로 아들을 낳은 엄마 덕에 남동생의 탄생 후 남동생을 본 셋째 딸로 이쁨을 받으며 살게 됐다. 남동생의 탄생은 그저 누군가 태어났다는 의미를 넘어 온 가족의 화합과 평화를 가져다주었는데, 아들 문제로 소원해졌던 부모님의 관계 개선은 물론 조그맣고 말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 우리 가족은 모두 힘을 합쳤다. 


   시골에서 상경해 독학으로 대학까지 가신 아빠는 나름 자수성가하셔서 작은 병원의 행정부원장을 하셨다. 하지만 결혼 전까지 사업을 하셨던 엄마는 아빠를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네 아이의 엄마로 살아야만 했는데 그런 엄마를 위해 아빠는 매주 주말마다 맛집이란 맛집은 다 다니며 외식을 시켜주셨고 종종 영화관람을 보너스로 시켜주셨다. 지금도 여의도의 '명동돈까스' 영등포의 '은성회관' 신길동의 '예랑'이라는 레스토랑이 기억난다. 먹성이 좋던 우리 사남매는 외식을 해도 돈이 꽤 나왔는데 여느 부모님들이 그렇듯 '우리  애들은 먹성이 좋아 고깃집에 가서 몇십만원 원치를 먹었다' 라며 종종 지인들에게 자랑하시는 걸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 생애 첫 영화는 우뢰매였던 거 같지만 외화 시리즈는 온 가족이 함께 본 '킹콩'이었다. 글씨도 읽을 줄 모르던 나는 화면의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히 영화에 매료되었었다. 그날의 추억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약간 완벽주의자였던 엄마에게 큰 컴플렉스는 고졸이라는 학벌이었는데 학벌 컴플렉스를 없애기 위해 엄마는 우리에게 꽤 많은 투자를 하셨다. 어렸을 적 우리의 방은 삼면이 모두 책으로 둘러싸고 있었고 삼국지와 수호지는 소설, 만화 등 종류별로 구매해 읽오록 하셨다. 하지만 엄마의 학벌 컴플렉스를 떠나 어릴 적부터 머리가 좋았던 큰 언니와 조금 늦게 뒷머리가 트인 둘째언니는 항상 시험에서 평균 90점 이상을 받아왔고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있던 배치고사 200점 만점에서 197점을 맞고 고등학교를 입학했다. 


  언니들이 학업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막내딸이였다.  남동생을 본 이후 사랑이 더 커진 덕분에 버릇이 꽤 없었는데 엄격했던 엄마에게는 여러번  맞았지만 온화한 성격의 아빠에게는 단 한번도 맞은 적이 없으며 원하는 건뭐든지 받아내었다. 실제로 10살의 어느날 백화점에 갔는데 예쁜 큰 눈을 깜박이고 빨간 공단 레이스 옷을 입은 너무 예쁜 인형이 있었다. 정확한 가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도 비싼 가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는 내 손을 잡아 끌며 절대 안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누워 발벌둥을 쳐대기 시작했다. 원래 엄마였다면 어딘가로 끌고가 호된 훈육을 시키셨겠지만 옆에 아빠가 나를 일으켜 세워 안아주며 내 손에 인형을 안겨주셨다. 그 시절 모든 게 만족스러웠던 나는 내가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었다. 키는 다 자라지 않았지만, 어른들만큼 생각할 줄도 알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모든 걸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모든 생각은 든든한 그늘이 되어주셨던 부모님 덕분인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10살의 나는 매주 친구들과 돌아가며 과자 파티를 했고 생일은 경양식집 레스토랑에서 했었다.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었고 내가 생각하는 내 미래는 창창했으며 한없이 철없고 밝은 아이였다. 10살의 나는 언제까지나 그런 삶이 내게 지속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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