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요즘 과거, 부모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용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설정의 대본을 쓰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어려울까를 생각해 보니, 내 자신부터 원망과 용서라는 개념을 무척이나 추상적로만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인공은 어떤 원망을 하고, 어떤 식으로 용서하게 되는 걸까? 그래서 우선 부모를 향한 원망과 용서에 대해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기로 했다.
우선 사람은 왜 다른 이를 원망하는 것일까? 사전적으로 원망은 못마땅하여 불편하고 미워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모에 대한 원망은, 어린아이가 그들이 못마땅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부모를 단 한 순간도 못마땅해하지 않고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형제, 자매간의 다툼에서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서운함 쯤의 정도부터 부모들의 부족함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했던 서러움 정도, 방치나 학대 등 범죄로 정의할 수 있는 수준까지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내 경우에는 꿈을 포기시킨 경우였는데, 사실 나의 어릴 적 꿈은 만화가였다. 하지만 내 부모님은 그들이 그리는 나의 미래가 따로 있었고, 만화가도 돈을 벌지 못하는 직업이라며 그들은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진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화가는 살면서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의 유일한 직업이었기에, 그것을 포기하게 만든 그들을 향한 원망스러움이 오래도록 남았던 기억이 있다. 따지고 보면 결국은 내가 포기한 것이고, 인문계로 가서 약사가 되긴 했지만 뭐랄까 가슴 뛰는 사람보다는 적당히 조건 보고 결혼한 느낌이긴 하다.
이렇듯 부모는 미래, 나아가 가치관과 애착 관계 형성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그들을 향한 원망은 타인을 향한 것보다 깊고 오래갈 수 있다. 그런 부모들이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유년기에 마음속에 깊은 생채기를 입은 사람은 흉으로 남아버린 상처 때문에 분노와 억울함에 사로잡힐 것이다. 물론, 그 감정은 정당한 것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곱씹게 되는 것은 피해의 본능적인 반응이며, 그 질문은 시간이 지나 희미해질지라도 원망이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당했던 감정은 종종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로 바뀐다. 마치 어린 코끼리에 족쇄를 채운 채 키우면, 쇠사슬 단번엔 끊어버릴 수 있는 성체가 되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부모를 향한 원망’이라는 족쇄를 끊어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부모가 그들의 지난날 과오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넨다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 사람은 한참이나 지나 버린 일을 굳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족쇄를 채운 이들이 그것을 끊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끊어내야 한다. 원망을 스스로 그만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용서다. 하지만 부모에게 큰 상처 받은 이들은 용서라는 방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입장이 되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며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몰비용’이라는 경제학적 용어를 근거로 그렇게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말하고 싶다.
잠시 내 대학시절을 얘기해보자면, 나는 회사를 다닌다면 오너로서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경영, 경제학 수업을 청강했었다. 그때 ‘매몰비용’이라는 개념을 배웠는데, 식당에서 이미 주문한 음식이 마음에 없다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보통의 경우에는 돈이 아까우니 억지로 꾸역꾸역 먹는 것을 선택하는데, 사실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이다. 이미 비용은 내가 먹든 먹지 않든 동일 하게 지불해야 한다. 남은 것은 맛없는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의 선택만 남아있을 뿐이다. 억지로 먹고 남은 불쾌한 감정, 식당에 대한 험담으로 가득 채워져 버린 대화, 불편해진 속으로 추가로 사 먹어야 하는 약까지 추가적인 손해까지 발생한다,
사설이 길었지만, 그것이 과거에 대한 부모, 타인을 향한 원망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이다. 용서는 모든 것을 잊거나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용서의 핵심, 상처를 직시한 후에 ‘더 이상 그 기억에 나를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결단에서 비롯된다. 용서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나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절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여전히 사과받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고, 가해자가 뉘우치지 않으며, 세상은 그들이 어쩔 수 없었다며 용인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용서는 마치 불공정에 굴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진정한 용서는 ‘상대가 변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내가 더는 그 사람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결국 정리해 보자면, 원망은 과거에 머물게 하지만, 용서는 미래로 나아가게 한다. 부모를 향한 원망은 부모와 어린 시절 힘없던 나를 향해 던지는 돌이지만, 그 돌은 종종 현재의 자신까지 다치게 한다. 반면 용서는 과거의 자신에게 건네는 연민이며, 치유의 시작이다. 때로는 충분히 원망한 후에야 진짜 용서가 가능하겠지만, 언젠가, 그 용서가 코끼리의 족쇄를 끊어내듯, 맛없는 식당을 박차고 떠나듯 내 삶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