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으로 가을의 기운이 느껴진다. 나무는 여러 색깔의 잎으로 한해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옛이야기는 늘 예스럽지 않고 새롭게 다가온다. 항상 추억은 새로운 옛이야기다. 추억의 장소에서 가면 옛이야기는 클래식 영화처럼 상영된다.
추억은 나를 생생하게 만든다. 과거의 이야기들이 현재의 나를 싱그럽게 만든다. 추억 속에는 아픔과 상처들이 있지만, 세월은 아픔과 상처들을 다디달게 만들어 눈물짓게 한다. 내 청춘의 일기 속 하숙집은 추억 갈피 중 가장 즐겨 찾는 부분이다.
강릉에서 대학을 다녔다. 독립된 생활과 마음껏 놀 수 있는 자유를 꿈꾸며 철없이 즐거워했다. 자취를 희망했지만, 아들의 게으름을 잘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삼촌의 후배를 통해 하숙집을 구하셨다. 강릉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생경한 풍경에 살짝 긴장하였다. 이불 보따리와 옷 가방을 양손에 들고 갈아탈 버스를 찾는 모습은 영락없는 대학 신입생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하숙집으로 향했다. 버스는 논과 밭을 그리고 오죽헌을 지나 조그만 슈퍼 앞에 나를 내려 주었다.
하숙집은 낮은 산의 중턱에 지어져 있었다. 돌계단을 30여 개 오르니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 기와로 마무리한 한옥이 나타났다. 잘못 찾아왔나 싶었던 순간 강아지 한 마리가 나를 보며 신기한 듯이 쳐다보더니 짓기 시작했다. 강아지 짖는 소리에 주인아주머니가 나오셨다. 뿔테 안경을 쓰고 단발머리를 하나로 묶은 만삭의 아주머니가 낯선 강원도 사투리로 기다렸다는 듯이 날 반겨 주셨다. 맞게 찾아왔나 보다. 아주머니와 어색한 인사가 오고 가자 하숙집 형들이 창호지가 발린 여닫이문을 열고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이렇게 나의 4년간의 하숙 생활은 시작되었다.
첫날밤, 합판으로 만들어진 낮은 천장과 벽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종이 벽지, 1년 내내 환기를 보장할 것 같은 창호지 문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잠자리는 얇은 매트리스 한 장과 아크릴 담요로 완성되었다. 연탄보일러로 난방은 되고 있었지만, 외풍으로 코가 시려 와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내일 집을 옮긴다고 할까? 바로 이야기하면 미안하니까 1주일 뒤에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하숙집 첫 식사 후 여기가 내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숙집 주방은 아궁이가 있는 재래식 부엌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안방으로 음식을 전달 할 수 있는 조그만 창이 있었다. 그곳으로 아주머니가 음식을 전달해 주셨다. 막내는 항상 제일 먼저 상을 펴고 수저를 놓고 밥상을 차렸다. 네 명의 형들이 도착하면 주인아저씨와 식사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과 저녁을 이런 식으로 먹었다. 그 순간만큼은 진짜 식구였다. 그렇게 시작한 하숙 생활은 4년이 되었고 한 하숙집에 머물면서 입학과 졸업을 하게 되었다. 막내로 시작한 하숙 생활은 복학하는 형들 탓에 4학년이 되어도 막내 생활은 끝이 나지 않았다. 내 뒤로 신입 하숙생은 오지 않았다. 내가 입학을 한 해에 아주머니의 둘째가 태어났다. 아주머니는 둘을 키우며 하숙생들 식사까지 준비하시기는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는 입학 초기에 처음 야생을 맛보는 망아지처럼 들과 산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기 바빴다. 공부를 지독히도 싫어해서 노는 이슈가 아니면 학교에 가지 않았고 매일 늦잠 자기 일 수였다. 당연히 아침 거르는 일은 허다했고 하숙집 형들의 잔소리가 늘어 갔다. 밤새워 먹은 술로 잔뜩 토한 어느 날, 그날도 느지막이 일어났다. 툇마루에 앉아 멍하게 앉아 있는데 마루 끝에 편지가 한 통 있었다. 편지에는 아주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적혀 있었다. 내가 아침도 거르고 늦잠 자는 것이 걱정되신다고 하셨다. 그 편지로 인해 갑자기 엄청나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아침밥을 거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 타지 생활에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앞으로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등의 고민에 일상의 규칙은 중요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편지 한 통이 날 걱정 해주는 사람이 어머니 말고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언덕 중턱에 있는 우리 하숙집이 보인다. 주인아저씨가 퇴근하면 아궁이에 군불을 때기 시작하신다. 하숙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친구들에게 “저기 우리 집이야. 아저씨 퇴근하셨나 보다.” 하면서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곤 했다. 하숙집 뒤편은 대나무 숲이 우거진 낮은 산, 앞쪽은 개울과 논이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커피 믹스 한잔을 마시며 옆방 형의 기타 연주와 함께 들려주는 노래를 듣는 순간은 청춘 영화의 엔딩 장면 같았다. 따듯한 햇살과 흙담 넘어 계절마다 변하는 풍경은 피할 수 없는 사치였다.
하숙집 화장실은 자연과 함께 하는 장소였다.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할 때는 소리 질러 물어보고 가곤 했다. 밤에는 전등이 켜져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화장실에 앉게 되면 눈앞에 작은 창이 뚫려 있다. 누가 생각했는지 그 사람은 참 재기발랄한 사람일 것이다. 화장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조그만 창을 통해 버스 정류장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큰일을 보다가 가끔 친구가 내리면 큰 소리로 불렀다. 두리번거리며 어리둥절한 친구를 보며 낄낄거렸다.
늦은 나이에 공부에 욕심이 나서 상담심리대학원을 다녔다. 긍정심리학 과목을 수강하던 중 감사 편지 쓰기가 중간과제로 주어졌다. 편지를 받을 대상을 선정하기가 제일 큰 과제였다. 어떤 분을 고를까? 며칠간 고민한 끝에 하숙집 아주머니를 선정했다. 나의 가장 어리석고 철없던 시절을 따듯하게 감싸주셨던 아주머니가 몇 번을 고민해도 선정 순위에 항상 1번을 차지했다.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대학교 1학년 시절 막무가내로 살던 나에게 보내 주셨던 아주머니의 편지에 24년 만에 답장하게 되었다. 고속버스표를 예매하고 차에 올랐다. 대학을 다닐 때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집에 다녀왔다. 버스에 오르기 전 신곡 음악 테이프를 사서 타곤 했다. 왕복 8시간의 여정 속에 신곡 테이프를 듣는 건 당시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서태지는 집에 가는 길의 단골 메인 가수였다.
아주머니를 만나서 어떻게 분위기를 만들고 편지를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어느덧 버스는 강릉에 진입하고 있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은 이전하여 세련되어지기는 했지만 생경함을 줬던 정겨운 맛은 없었다. 시내버스 창 넘어 보이는 하숙집 가는 풍경은 예전과 달라졌다. 높은 아파트와 상가건물들이 예전에 논과 밭이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숙집 돌계단은 시멘트 계단으로 바뀌었고 허술한 보안시스템도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문이 대신했다. 태풍과 홍수로 집은 쓰러져 가고 있었다. 나무 기둥으로 처마를 받치는 등 응급 처치는 해주었지만, 근근이 버티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아주머니가 오시는 동안 잠시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래식 부엌은 현대식으로 개조되었고, 한여름 밤 시원하게 등목을 해주던 수동 작두 펌프도 녹이 슨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살짝 눈물이 났다. 다들 나이가 들어 보여 그냥 눈물이 살짝 났다.
아주머니가 내가 입학한 해 태어난 둘째와 함께 계단을 올라오신다. 셋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사람도 집도 세월의 흔적들이 보였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꾸 아주머니는 어쩐 일로 왔는지, 별일 없는 거냐며 걱정하셨다. 왜 찾아오게 되었는지 설명들이고 준비해간 편지를 읽었다. 눈물이 나서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아 주셨다. 고맙다고.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아주머니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좋은 기억으로 입가에 웃음이 머물게 하는 것이 있다. 문득 떠올라 혼자 웃게 된다. 하늘을 올려 보게 된다. 기분 좋은 추억들은 삶에 긍정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29년이 지나도 하숙집 처마 끝과 갈라진 툇마루의 결, 세월을 머금은 여닫이 문고리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은 저녁 무렵 하숙집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 같았다. 툇마루에 놓인 아주머니의 편지는 내 기억 속의 샛별처럼 언제나 반짝거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