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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희 Jul 02. 2020

5월 전시 프랑스 정신분석가 가스파르 교수님 비평

Les Impensés de l'infantile
유년 시절 지나친 것들

I long to see your face (당신의 표정이 궁금해요)-이환희, 박미선 전시에 관하여

(마린아트스페이스, 2020년 5월)



 본 전시가 열어주는 정신적, 감정적 공간은 한결같이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재료의 선택, 사용과 같은 기법상의 특성이나 볼거리(spectacle 스펙터클)로써 제시된 부분을 넘어서,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는 모순적인 흐름 안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이는 단순히 “보는 것”과 관련된 것인가? 적당히 시선을 두는 것, 그리고 그것에서 잉여 향락(plus-de-jouir, 라캉)을 도출해내는 것과 관계되는가? 원색적이거나 두려움의 대상인 정동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것인가? 이 전시의 여정은 유동적이고, 결국에는 늘 하나의 개별적인 산책이 된다. 그때, 우리가 논의할 것은 무의식적 선택들과 침묵의 지점들이 아닐까?


A quoi rêvent les jeunes femmes en fleurs ?

꽃에 둘러싸인 젊은 여성들은 무엇에 대해 꿈꾸는가?

내면의 시나리오 속, 미묘한 대립이 펼쳐진다. 부드러움, 관능, 몸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개화와 실현 사이에서. (이러한 실현은 끊임없이 생명력을 부여하는 환상의 각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욕망과 결합하는 이 충동적 과잉은 태생적으로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그리고 주체는 일반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것인가?
모성의 상징들(attributs), 모성 경쟁에서 그토록 많은 질투와 죽음을 소망하게 하는 “독점적 (privatif)” 젖가슴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⑴

< Attack a nipple > Miseon Park, 2019, 25 x 10 cm, acrylic on paper ⑴


몸을 버려야 하는가, 그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동요하고, 달리고, 수영하고, 물에 뛰어들고, 날아야 하나? 그것을 조각 내고, 절단하여 팔아치우는 것은?⑵

우리의 근대성이 찬양하는 자기 성애적인 고독의 매개체, 상품화된 대상을 우리의 몸에 덧붙여야 하는가? 이는 괴로워하고 즐기는 몸이 주체를 조금은 평온하게 하기 위함이다.⑶

< Swimming Ground >, Miseon Park, 2020, 73 x 61cm, acrylic on canvas ⑵


< Sex toy >, Miseon Park, 2020, 35 x 30 x 30 cm, printed box ⑶, 전시 전경


작품들의 정제된 배열 속에서 반복되는 것은 무엇인가? 떨어져 나온 주체의 작은 비밀들인지. 혹은 질문하는 타자의 금지를 피하려 하는, 숨겨진 "저변에 있는 것”인지.

간단히 말해, 이 침묵의 지점들, 이 모든 억압의 씨앗들이 사후성(L'après-coup, 라캉) 안에서, 꽃과 식물의 배치를 통해 언급되지 말아야 할 것을 조심스레 은폐하도록 도울 것이다. 실재는 결코 말해질 수 없을 것이다. 승화하려고 시도할 뿐이다.⑷

< Lethargy 2 >, Miseon Park, 2020, 65 x 50 cm, acrylic on canvas ⑷


그것을 증명하듯 전시 포스터의 문구 “I long to see your face. (나는 당신의 표정이 궁금해요)”는 마르그리트를 연상케 하는 젊은 남자의 대위법으로 쓰였다. 초록빛 표면 위에 부유하듯 누워있는 이 남자는 환각적으로 보이고, 마치 너무 빨리 사춘기에 이른 아이가 강아지 인형 더미 아래에서 잠들었거나 질식한 듯 보인다.

“I long to see your face”. 이 말은 향수에 젖어 속삭이는, 어쩌면 흘러가는 시간에 의해 억제된 하나의 부름이 아닐까? 이는 절박하게 재회를 외치는 소원일까, 아니면 이제는 불가능한 욕망,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상실의 견딜 수 없는 상태와 마주했던 것일까?⑸

< Dogs >, Miseon Park, 2020, 30 x 30 cm, acrylic on canvas ⑸


이는 분명, 도달하지 못한 요구이자 호명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기다림이라 할 수 있고 이는 전시 전반에 실마리로써 작동한다. “I long to see your face” 기대에 어긋난 사랑처럼, 타자가 등을 돌렸다는 말일까? 허나 단순히 잠시 부재중인 것이 아니라면? 그는 죽음의 황량한 바닥에 영원히 갇혀 있었을까? 이미지, 사진, 연출된 기억만으로는 선과 형태, 타자에게 수줍게 가려진 얼굴의 섬세함에 생기를 되찾아 주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인가?


 

 Symbolique végétale : vanitas!

식물(성)의 상징: 바니타스! (Vanitas : 라틴어로 ‘세상의 삶이 일시적이고 부질없음’)


초록으로 가득 찬 수많은 창조물들 - 필름지에 인화된 두 장의 디지털 사진이 말하려는 건 무엇일까? 일시적인 꿈 혹은 불행한 운명을 나타내는 초록. 수많은 거듭남을 의미하는 영원한 침묵의 초록.


< Vert II >, Fanny LEE, 2020, 디지털 프린트, 12×8cm⑹

그리고 두 초록 울타리 사이 고인 물에 비친 걱정스러운 기이함.⑹

이 곳은 기억과 탈바꿈의 장소일까? 혹은 물을 달라는 라토나 여신의 청을 거절하여 그 벌로 개구리로 변하게 된 뤼키아 농부들을 숨겨놓은 곳일까?

이 사진 작품의 배경 속 인물들은 학구적인 태도로, 작은 식물 세계에 매료된 사람들처럼 긴장되고 섬세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은 형태와 텍스쳐에 집중하여 불꽃놀이를 연상시키는 듯한 색감과 꽃의 폭발을 보고 있다.⑺

색의 놀이, 초록을 해체하는 유희, 그리고 목탄 소묘의 어둠과 밝음의 대조.

< Vert I >, Fanny LEE, 2020, 디지털 프린트, 12×8cm ⑺



앵무새 튤립(Tulipe perroquet) : 둘로 나뉜 여성.

엷게 채색한 여성의 몸, 늘어진 팔, 부케를 든 손, 잘라진 가슴.

누구에게 바치는 꽃인가? 연인에게? 어머니에게? 이미 죽은 사랑에게 바치는 희생인가? 혹은 우리가 마땅히 기려야 하는 조상들에게?

탄생 - 거듭남 - 소멸 - 영원회귀 - 기억의 거행.

이 모든 것이 앵무새 튤립 안에 있다. 마치 정글 깊은 곳에 사는 새가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과 같이. 삶의 미스터리를 만들어내는 저변에 즐거움과 우울의 손길이 있을 것이다.

< Tulipe perroquet I et II >, Fanny LEE, 2020, 종이 위에 목탄,콩테 33.4x53cm, 35x65cm



염소 버들나무(Salix Caprea) : 저기 무리 지어 있는 말들과 망아지들을 따라 시골 마을의 활기를 느끼며 산책길을 떠나보자. 목탄화로 그려진 나무는 그림 상단을 감싸며 배경의 깊은 곳에 자리한다.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이 나무를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그곳이 바로 식물(성)의 상징으로 들어가게 하는 지점이다. 버드나무는 특유의 풍부한 생장으로 인해 순결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의 몸과 풍요로움이라는 클리셰를 은총과 우아함 같이 축복된 것으로 승화시킨다. 이 그림은 디테일을 통해 의미심장한 놀라움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뒤이어 보게 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두 번째 요소처럼.

전원 풍경의 무해함 이면에 (에드가 포의 도둑맞은 편지 안 에서처럼) 눈에 띄어야 할 가시적인 것은 장갑처럼 뒤집히고,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두 마리의 말 혹은 성기 모양을 한 배설부가 두드러지는 이 아름다운 엉덩이에서 무엇을 봐야 할까? 여기서 또 하나 결여된 것은 (거세와 비슷한 대리물인) 잘리고 줄어든 꼬리이다. 꼬리의 부재가 말의 엉덩이와 동물 무리에 가치를 부여하고, 미리 봉인된 죽음의 생성(되기, devenir) 또한 상기시킨다.

< Salix Caprea >, Fanny LEE, 2020, 종이 위에 연필,목탄,콩테 29.7cm×42cm

염소 버들나무(Salix Caprea) : 생의 나무. 물론 그러하지만, 나무가 기울고 휘며, 그것이 울음소리*를 낼 때,

(*프랑스어 pleureur는 울보, 혹은 버드나무를 부를 때 붙는 호칭이다) 버드나무는 하나의 동일한 움직임 속에서 불행한 사랑과 죽음의 왕국을 맺어준다.




De l'insu à l'innommé

미지에서 무명으로


튤립 다발에서부터 생의 나무, 이미 봉인된 운명의 동물까지, 모두 은밀히 거절된 존재의 원초적 질문의 유아기적 상징을 띤다. 살아있는 것들의 수수께끼, 성과 죽음, 상징화하고 상상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잡히지 않는 실재.

실제로 이 일련의 회화, 데생 그리고 섬세한 식물(성)의 공간 안에서 무언가에 둘러싸여 조심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구성 속, 어떻게 실재에 구멍을 내는 징후와 흔적들(라캉), 그리고 말하는 주체의 근본적인 미숙함을 찾아내지 않을 수 있을까. (말하는 주체는 성적인 것과의 조우 안에서 항상 붙잡히고 사로잡히고 놀란다.)

꽃을 든 소녀와 여성 사이에서 몸의 추방, 여성(féminin)을 향한 닿을 수 없는 여정은 영원할 것이다.


유희적인 해결책으로, 실제적 환기의 역할을 하는 짖궂은 제스처가 제시된다. 팀 로고의 공룡 이미지와 슬로건 “Mauvaise Herbe (모베 제흐브 : 잡초(직역하면 나쁜 풀)”가 새겨진 가운은 표준화되가는  삶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 짓궂은 초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Performance 'Terrarium & Aquarium' 2020, Miseon Park, Fanny LEE


생명의 상징인 야생의 풀들, 누군가는 쉬이 뽑고, 자르는 그것들을 우리는 도리어 찬양해야 하지 않을까? 많은 미물들과 곤충들이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곳. 그들의 뿌리가 자양분인 토양을 환기시킬 때. 소진되고 오염시키는 도시의 삶에 반하는 우리의 영혼과 예측 불가능한 생태계가 지닌 가능성들은 늘 존재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각 개인들에게 주이상스(jouissance)와 같은 실재와 어떻게 화합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허나 (바이러스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시기에)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사회적 유대를 꿈꾸게 하며 또 다른 방식을 보게 하는 태도가 시의 적절하게 느껴진다.

 Jean-Luc GASPARD, Psychanalyste- Professeur des Universités

프랑스 정신분석가, 임상심리사, 렌느2대학 심리학과 교수 장 뤽-가스파르


번역 : 박미선, 이환희



전시 포스터와 2020년 5월 2일 오프닝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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