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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희 Aug 10. 2020

누군가의 처음이 된다는 것

도로주행 6시간을 생각보다 재미있게 마치고 대망의 시험 날이 되었다.

일전에 내 도로주행을 함께 해주신 세심하신 선생님이 감독관이 되셔서 괜히 마음이 놓였다.


선생님의 첫마디는

‘이제 운전면허 시험을 볼 거예요 그런데 이건 얼마나 운전을 잘하는지를 보려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규칙을 잘 지키는지를 보는 거예요’였다.



가장 쉬운 A코스에 랜덤으로 배정받았는데 시험 내내 한마디도 안 하시면서 패드에 체크만 하시던 선생님이 시험이 끝나고 차를 세우고 나니

핸들이 불안정하다 오른쪽으로 쏠려 간다며 아슬아슬한 합격점수를 말씀해 주셨다.


아빠에게 전화해서 아쉬운 합격 소식을 알리니 아빠도 시험 때는 점수가 그리 높지 않았다 위로하며 합격을 축하해 주었다.


도로주행 연수를 나갈 때와 마치고 학원으로 다시 올 때는 선생님들이 운전대를 잡으시는데 수강생들에게는 엄격한 규칙을 운운하시고 당신들은 슬렁슬렁 운전대를 잡는 걸 봤다면 분명 적지 않은 실망을 했을 거다.


반면 내 첫 운전 선생님은 앞으로 내가 도로 위를 달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매우 분명하게 전달해 주셨다.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말이 떠올랐고 선생님께 새삼 감사했다.




최근 새로 맡게 된 아이들이 미술을 처음 접하는 5세이다.

엄마랑 이제 막 떨어져 지내게 된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1시간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뭔가를 한다는 자체가 대단하게 여겨진다.


운전이나 미술이나 사실 테크닉은 부수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은 ‘태도’나 ‘마음가짐’이다.

테크닉은 누구에게나 전수받을 수 있지만 뭔가를 처음 접함에 있어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는 곧 가르치는 자의 태도이고 정작 마음에 오래 남는 건 그 태도이기 때문이다.


5세 아이들은 신기하리만치 주관을 가지고 있다.

어느 순간 집중해서 열심히 그리다가 손을 놓는다. 오히려 초등학생들이 ‘귀찮아서’ ‘팔이 아파서’ ‘오늘 학교에서 기분이 안 좋았어서’ 등의 이유를 대지

더 어린아이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라는 조금은 결연해 보이는 태도마저 보이며 ‘다 그렸어요’ 한다.


그럼 나는 대부분 ‘그만하면 됐다’ 한다. 물론 어른들(부모를 포함한) 눈에는 한참 모자라 보일 수 있지만 거기에서 좀 더 구체화시키고 형상화시키는 게 그렇게 큰 의미는 없다. 이전에 여러 번 학원 선생님의 입장에서 ‘거기를 좀 더 그려볼까? 좀 더 칠해볼까?’라고 거의 애원에 가깝게 말해봤고 나도 아이에게도 별로인 걸 이미 경험했었다.


그 어떤 아이도 자기가 칠할 색을 절대 내게 물어보지 않는다. 웬만한 아이들이 그토록 확신에 찬 모습은 신기하게까지 여겨진다.


부모들의 흔한 착각인 ‘내 아이가 천재인 줄 알았어요’는 사실 참말이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그냥 상어, 고래, 공룡은 없다. ‘프로토케라톱스’ 나 ‘숨구멍이 위에 있고 이빨 옆에는 수염이 나 있는 혹등고래’ 같이 일단 아이들의 세상에 기입되기 시작하면 무엇이든 아주 정확하게 묘사된다. 비록 내가 아는 형상으로(눈과 지느러미와 꼬리를 알아볼 수 있게) 혹등고래를 그리지 않았어도 이미 이 작은 아이는 옆의 콩알만하게 그린 물고기에 비해 수십 배 크게 이 거대한 선을 그어서 크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바닷속에서 보이는 것 같이 푸르고 어둡고 붉기까지 한 신비하게 뒤섞인 여러 색을 써서 고래를 칠했다.

이 아이의 혹등고래는 완벽하다. 바다를 건널 때 직접 내 눈으로 고래를 봤지만 이 아이가 아마 스크린 화면을 통해 봤을 고래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어른들은 이 고래를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다.


더 정확하고 더 올바른 선을 그어 고래를 그야말로 고래처럼 보이게 하는 게 과연 중요할까. 그 수많은 교정선들이 몇 년 후에 ‘선생님 저 그림 못 그려요’ 하는 아이로 만드는 건 아닐까.


아이들 앞에 마주 앉아 이렇게 아이들의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를 엿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나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보게 된다.

당장 눈 앞의 크고 작은 선택지 앞에서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어느 것 하나 선택하지 못하는 어른이 된 나도 이렇게 어렸을 때엔 선 하나에도 이토록 확신이 있었을까. 나를 망설이게 하는 건 내가 남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하는 염려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패디큐어를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네일샵 언니 : (발등에 단순한 선 몇 개로 새긴 낙서 같은 새 타투를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거 진짜 타투예요? 안 지워지는 거예요?’

나 : 네

네일샵 언니 : 무슨 새인데요?

나 : 참새요

네일샵 언니 : 다음부터는 누가 물어보면요 호주 어디에 사는 어려운 새 이름이라도 대세요


웃픈 실화다.

어른이 돼서도 끊임없이 교정받는다.


다섯 살 아이가 그린 혹등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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