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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희 Aug 21. 2020

그랜드 투어를 마치고 돌아와서

우리 엄마 아빠가 18세기 귀족은 아니지만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코로나 긴급뉴스 틈에서 지구 반대편,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역시나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는 바닷속 동물들에 대한 다큐를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난 거실에서 안방 화장대에 계신 엄마한테까지 들리게 소리 높여 '엄마 참치가 300kg가 넘는다네? 진짜 대단해' 하며 내가 본 내용들을 전달하고 있었다.

엄마는 나갈 채비를 마치고 나는 다큐를 다 보고 음식물쓰레기를 정리하고 있자니 구부리고 앉은 내 등 뒤로 '나도 예전엔 너처럼 동물 다큐를 정말 좋아했거든 왜, 동물농장도 매주 일요일 아침 꼭꼭 챙겨 봤었잖아. 근데 지금은 더 이상 보질 못하겠어 잡아 먹히는 거 보면 불쌍해서'라는 말을 하셨다.

나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동물 다큐를 여전히 즐겨 본다. '엄마 그게 동물들 삶이잖아. 난 그 세계를 엿보려고 보는 건데'


요즘 부는 채식 바람 훨씬 전에, 프랑스에서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 나 '육식의 종말' 같은 책을 배송받아 읽으면서 육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매주 토요일 아침 7시부터 12시까지 여는 시장에서 농장주들이 직접 기른 닭이나 계란, 토끼, 방울토마토, 꽃 등을 샀다. 잘 가던 정육코너에 가면 정말 코를 찌르는 역한 고기 냄새가 났다. 플라스틱 용기에 예쁘게 담겨 여러 겹의 랩으로 포장된 한국의 정육점에서는 그야말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지만 프랑스의 정육점이나 정육 트럭에서 털과 깃털만 겨우 제거된 채 머리가 모두 붙어 있는 작은 동물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는 냄새였다. 하루는 poulet roti를 해 먹으려 닭을 한 마리 달라고 했다. '(벼슬까지 달려있던) 머리는 아저씨가 잘라주세요' 하니 아저씨는 '넌 머리는 안 먹니? 이 좋은 걸. 나는 형제가 많은 집에서 태어났는데 엄마가 닭 요리를 할 때면 서로가 머리를 가지려고 난리였지' 라며 닭 머리를 댕강 잘랐고 나는 얘길 들으면서도 눈은 허공에 뒀었다.


몇 년을 가던 정육점에선 얼굴을 익힌 아저씨가 돼지고기를 주문하니 마침 오늘 고기가 아주 싱싱하다며 냉동고 문을 열고 들어가 거꾸로 매달린 돼지의 어느 부위를 얇게 회 떠 내게 건넸다. 아저씨는 이미 몇 점 우물우물 씹고 계셨고 나는 눈은 웃고 입은 울상인 얼굴로 한 점 꿀꺽했었던 적도 있다.


언제는 멧돼지를 사냥했다는 지인의 지인이 몇 근 단위로 고기를 파니 며칠 내로 와서 사 가라는 '육 공동구매'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아무래도 그 단위가 너무 커서 나는 사지 못했지만 큰 동물을 사냥해서 주위 사람들과 나누는 이 행위가 어떤 의식처럼 와 닿았다. 물론 그 사냥이 헌팅 트로피만을 위한 취미가 아닌 한에서 말이다. 엄마에게 이누이트족이 고래나 순록을 사냥하는 걸 보고 나도 사냥을 해보고 싶다 하니 엄마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냐'라고 이해할 수 없다 하신다.


언젠가 자연에서 합법적이고 정당한 사냥을 살면서 한 번쯤 해 보고 싶다. 그래서 내가 이제껏 먹어 온, 또 먹을 고기들이 내 식탁 위에 오르기 전 뜨거운 피와 살과 뼈를 가진 살아 숨 쉬는 나와 다를 것 없는 생명체였다는 걸 내 두 손으로 직접 느껴 감사하고 싶고, 육식을 한다는 게 대체 뭘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다. 어쩌면 그걸 계기로 더 이상 육식을 하지 않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돼 나는 부모와 떨어져 살았고 처음 일본과 미국 여행을 시작으로 긴긴 유럽 생활을 하고 돌아왔다. 나의 어느 부분은 여전히 뼈속까지 부모와 닮았고 반면 부모가 다 알지 못하는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며 몇몇은 부모의 것과 전혀 다른 결을 갖게 되었다.


이민가방에 챙겨간 국제전화 시절부터 시작해 카톡으로 넘어오며 오히려 꼭 시간 맞춰 기다렸다가 전화할 필요 없이 손쉽게 일상 사진을 교환했다. 부모가 보내는 일상들은 거진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었고 내가 보내는 사진들엔 언젠가부터 부연설명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그 시기도 지나 어느 시점에서부턴 카톡에 말 한마디 없이 괴리가 큰 서로의 일상 사진들만 핑퐁을 하는 것처럼 올라왔었다. 사이가 안 좋았다기보단 꼭 필요한 말은 보이스톡으로 자주 짧게 해서였는데 서로의 일상이 가지는 의미가 이젠 잘 공유되고 전달되지 않는 이유가 컸다.


내 부모가 18세기 상류층 유럽 귀족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멋지고 경건한 마음으로 나를 바다 건너로 보낸 건 맞다. 그저 몇 해의 유행 같은 해외유학이 아닌 아마도 긴 시간 떨어져 있을 거라는 걸 우리 가족 모두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냥 우리끼린 알았다. 지금 와서 보니 내게 이토록 넓은 세계를 보여 주려 큰 의미의 교육적인 세계일주를 시켜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자식이 특정 직업인이 아닌 '멋진 여성'이 되길 바라는 나의 고마운 부모에게 내가 보고 경험한 세상의 풍경들을 기록해 둔 사진들과 함께 전하려 한다.

     

 

그랜드 투어, 이미지 출처 Google


*그랜드 투어(Grand Tour)는 17세기 중반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상류층 귀족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돌아보며 문물을 익히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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