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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파고 Dec 30. 2020

This Life : 잊혀지고 싶다는 말의  허영심

"내게 잊혀질 권리를 달라"


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용히 살고 싶은데 사람들이 곱게 놔두지 않을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한 사람들이 할만한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얼마나 웃기겠는가.


침대 옆에 작은 테이블을 놓고 노트북을 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었다. 그래 봐야 내 눈높이와 오른손이 마우스를 잡는 것만 맞추면 되지만.  넷플릭스가 없었으면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까. 라스트 킹덤, 썬즈 오브 아나키, 브레이킹 데드, 폴스,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수십 개의 드라마들과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하나하나 섭렵했다. 시간이 없어서 안 본 것들이다. 나르코스 시리즈의 파생상품들도 다 봤다. 멕시코 마피아들이 콜롬비아보다 더 무서운데 재미와 매력은 콜롬비아 시즌이 탁월했다.


아웃랜더 #512 oh, 제이미 프레이저, 롤리타의 첫 문장만큼 긴 찬사를 쓰고 싶지만 지면상 참기로 한다.


원래 스릴러, 중세, 전쟁 카테고리를 좋아하지만 의외로 단순한 하드코어 액션에 손이 가서 많이 봤다. 역시 단순한 게 필요할 때가 있다. 최애 드라마, 라기보다는 최애 캐릭터가 나오는 아웃랜더 시즌5를 몇 번이나 복습했다. 얼마나 많이, 샅샅이 봤는지 이젠 넷플릭스에서 볼 게 없을 정도이다. 시즌 막바지에 이르면 조바심이 나서 밤을 새워 끝장을 봤다. 배우들도 중복 출연이 많아서 평타 수준의 작품들은 이게 그건지, 저게 이건지 기억도 뒤섞인다.


북유럽 형사물은 부스스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은 여자 형사가 꼭 나오고 집안 인테리어는 이케아 카탈로그 같다.  우리나라 형사들은 집에 가면 부인 눈치를 보며 쭈그리가 되는데 저 사람들은 이혼 혹은 별거 중이어서 중간에 애들 라이딩하러 가는 일도 많다. 수사과정도 루즈하기 짝이 없는데 인구는 적고 땅덩이는 너무 넓어서 그런가 싶다. 시내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바로 울창한 숲에 파묻힌 도로가 나오고 한참을 달려야 옆 동네가 있다. 범인을 찾아가는데 풍경이 너무 서정적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대부분 시즌3 정도가 최고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홈랜드가 그랬고 하우스 오브 카드는 진저리를 치며 하차했었다. 그 뒤로는 뭔가 사건을 위한 무리수가 빈번하고 캐릭터들은 삐끗하며 개연성을 상실하기 일쑤다. 자기 복제를 하거나 발암 단계로 진입하는 드라마들도 많다. 지겹다 싶으면 그만 보면 되지. 그럼에도 끝까지 보게 하는 건 뭐라도 매력이 있다는 거다.


별 기대가 없었던 썬즈 오브 아나키는 의외로 감탄했는데 몇 군데 발암의 고비를 넘기고 엔딩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특히 마지막 30분 때문에 이 드라마를 기억할 것 같다. 배우들도 스크린 안팎으로 사연이 많은데, 주연 찰리 훈남(Hunnam 원어민 발음 허냄)의 연기가 훌륭하고 잘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바이크족, 60년대 무정부주의 히피문화, 총기 거래, 시골마을을 장악한 조직 등의 코드들이 장렬한 허무주의로 끝을 맺는 게 롱런할만했다. 사운드트랙이 딱 취향이어서 한참 BGM으로 깔고 살았다. This Life가 특히 좋다.

    


이제 내 삶은 랜선으로 움직였다. 하기 싫은 거면 몰라도 못 하는 건 없었다. 랜선에 나의 동지들은 많았다. 내 상태는 코로나 확진자 단계부터 시작해서  이제 치료가 끝나고 후유증이 남은 정도와 비슷할 것 같다.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격리된 상태를 비교하자면 말이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재택근무를 하거나 온라인 수업을 받는 수준이 될 것이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나 혼자 동지의식을 느꼈다.


아이들은 학교나 유치원에 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 무료하게, 힘들게, 혹은 고통스럽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넷플릭스에 이런 다큐멘터리가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가격리 중인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안타깝게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감동적이었다. 지루해하며 점점 지쳐가는 아이를 보는 엄마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래도 우린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는 대목도 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힘들게 참고 있다고. 화면 속 아무도 없는 거리에 햇빛은 눈부시게 쏟아졌다.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됐는데 코로나에 감염된 아기를 생각하면 나까지 아파왔다. 아픈 아기는 밤에 더 심하게 운다. 열에 들떠 우는 애를 휠체어에 태우고 밤새 어두운 병원 복도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던 기억. 20년이 넘었어도 생생하다.

하지만 코로나 치료 중에는 엄마가 안아주지도 못할 것이다. 쓰다듬으며 이름을 불러주지도 못할 것이다. 엄마가 해줄 건 이것밖에 없는데 그조차 못하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진다. 지금 그 아기는 다 았을까. 방역과 치료에 심신을 갈아 넣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고. 초비상 대응으로 6월이 지나가면서 조금씩 확산세가 줄어든 것 같다. 나도 목발 짚고 돌아다니는 시간이 점점 늘었다.

내 삶은 뭘까?

언제가 됐든 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미국에선 사망자의 보디 백이 아무렇게나 창고에 쌓여있다. 방역이 무너진 나라의 텅 빈 거리는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우리나라에선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코로나를 맞닥뜨린 불운한 사람들이 보도된다. 체대 수시를 준비하던 입시생, 면접을 앞둔 취준생, 가족 얼굴도 못 보고 세상을 떠난 노인들, 장례조차 못 치르고 고인을 떠나보낸 가족. 투잡 쓰리잡을 하던 가장들.  


그럭저럭 살만해지자 깨어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넷플릭스를 보다가도 수많은 생각들이 얕은 실개천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공포를 느꼈다. 처음 마주친 불의의 상황, 철통 같은 자가격리, 나는 흘러넘치는 고독과 자유 속에서 사후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내세나 사후세계가 아니라, 내가 떠난 이 세상의 모습 말이다. 전혀 빈자리가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 인간관계는 바늘구멍과도 같아 나의 안부를 물을 사람은 거의 없다. 가족과 극소수의 친구만이 소통대상이다. 그건 좋았다. 상황을 설명하고 위로 인사를 받고 그에 맞는 감사 인사를 하는 건 지치고 힘든 일이다. 공포는 다른 곳에서 왔다.


썬즈 오브 아나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삶의 흔적을 말끔히, 한 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실종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육체가 아예 갈아 없어지는 걸 택하는데, 사진이나 기록은 말할 것도 없다. 자기 자신이 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보고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조직의 정신 같은 존재였고 죽은 뒤에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역시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다. 더럽고 나쁜 삶이 아들에게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감상적인 자기혐오가 아니라 처절한 실존적 선택에서다. This Life.


나도 아주 오래전부터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고 마음먹기는 했다. 뭔가를 사는 걸 자제한다. 없어도 되는 게 대부분이다. 이젠 물욕도 거의 없다. 죽기 전에 없애야 할 내 물품들의 목록을 매년 업데이트하고 있는데, 물론 수십 년째 쓸데없이 보관해온 물건들도 여전히 많다. 언제 죽을지, 죽기 전에 내 손으로 없앨 수 있는 축복받은 상황일지 어떻게 안다고 이럴까? 마치 내 인생의 무의미함을 백 번 천 번 인정한다는 시위처럼 말이다. 이번에 그 목록을 떠올려보니 지금 당장 없애야 할 것들 뿐이었다.


내 삶은 너무 하찮아서 남길 것도 없다. 혹시 날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건 아니어서 의미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몇 사람만 있으면 충분하다. 사서 불행한 인간의 모델이 필요하면 날 보면 되는데 아무도 날 모르기 때문에 결국 모델로 쓰일 방법도 없다. 나를 돌아보면 결국 이런 식의 자조와 찌질한 체념으로 귀결돼서 일기를 쓰다가도 며칠이면 집어치우곤 했다. 이게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겸허한 인정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나의 최후, 삶이 끝난 후를 실감하니까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정말 흔적 없이 살다가 가고 싶은가? 그럼 가면 된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싶은가? 그럼 없애버리면 된다. 조승우의 광고처럼 아주 단순 명료하다. 그러지 않는 이유는,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은 걸 감추는 페이크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대중을 기만해야 할 다른 목적이 있는 거고,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건 실패에도 초연한 사람이라고 속이고 싶은 거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이다.  

  

나는 왜 태어나서 긴 시간을 살고 있는 걸까. 항상 답 없는 질문 끝에는 지쳐서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이젠 좀 분명한 이유가 떠오르며 구체적인 실행목표들이 이어진다. 이제까지는 열패감을 감추는 공허한 질문이었으나 지금 나는 먹고 싸는 소중함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졌기 때문이다. 왜 사냐고 묻거든, 침대에서 일어나 두 발로 걷는 것이라고 진실되게 대답하겠다.  


지금 일어날 수 있다면 그냥 집안 청소를 하고 싶다. 군대 간 아들의 짐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싶다. 먼지가 쌓인 집 구석 구석을 시원하게 치우고, 여름옷을 꺼내고, 작년 가을에 매단 커튼을 바꾸고 고양이들 화장실을 탈탈 털어 비눗물로 씻어내고 싶다. 십 년 전에 사놓은 레 미제라블 완역본을 읽고 싶다. 목발을 짚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내 물건들을 찾아보고 싶다. 물감을 꺼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 흙만 남아있는 화분에 뭔가 심고 싶다.       

나의 희망은 하찮고 단순하고 한없이 일상적인 일들인데 나만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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