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마지막 날
K는 성인이 되어서도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널 때 손을 들고 건넜다.
사람들은 180센티미터가 넘는 그가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흘끗흘끗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뭐라 하진 않았다. 마치 그들의 규범 양식엔 벗어나지만 '네가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 간섭할 생각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한 눈빛으로, 가끔은 경계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좀 더 덧붙이자면 '네가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내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정도가 될 것 같다.
하늘의 구름은 무척 쪽빛 물속에 막 풀어놓은 흰색 물감처럼 선명하고 진하다. 햇볕은 투명하고, 투명하고 선명한 것이 좋은 것이라 설명해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좋다고 인식하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무언가를 좋아하고, 좋다 생각하고, 자기와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강요하기도 하다가, 그것이 먹히지 않을 때에는 '아님 말고'식의 자기 방어를 하게 된다. K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에게 하는 강요 이상을 자신에게 하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마치 '너 정도의 사람이 내 말을 감히 안 들어?'라고 충분히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가끔은 그런 끈적함이 관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K의 현재의 행동양식은 철저히 자유 속에서 형성되었다. 어렸을 때 누군가가 가르쳐준 것들을 수용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무척이나 맞지 않는 논리의 강요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스마트폰을 많이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술 많이 마시지 마라'라고 했지만 성이이 된 이의 대부분이 하루에 절대적인 시간을 스마트폰에 의지하며 살고 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고 술과 연계되는 스케줄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하면 확연히 보이는 부당대우와 압박들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세상에는 누군가가 가르쳐준 것과 다른 것들이나, 때때로 유연하게 행동해야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존재한다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일괄되지 않은 유연한 행동은 또 다른 실패와 실수를 야기하고, 결국 그렇다는 건 평생 배우고 적용하며 살아도 같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결국 그 모든 인생의 줄기에는 '운'이라는 요소도 작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K는 그냥 풀밭에 누워 노래를 흥얼거리기로 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
활짝 연 창문 밖에서 그렇게 목청 놓아 울던 매미들은 아파트 계단에 시체로 나뒹굴고, 익숙했던 매미 울음소리는 이제 귀뚜라미 울음소리로 대체되었다. 그 소리가 계절 느낌을 주는 것인지 그 계절에 그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 느낌을 받게 되는 건지 잘 알 순 없지만 매미 소리를 들으면 왠지 더워지고,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옷을 여미게 된다. 귀뚜라미 소리는 붕어빵과 군고구마, 군밤을 생각나게 하고, 호이호이 호빵은 가을 겨울 통틀어도 서너 번 사 먹기도 힘들지만, 생각하는 횟수는 그보다 훨씬 잦다. 아마도 쌓여있는 추억의 횟수와 비례하겠지. 봄 여름의 추억보다 가을 겨울의 추억들이 더 깊은 냉장고 속에 보관된 탓일까? 이 계절이 되면 운동장에 풀어헤쳐놓은 강아지들이 날뛰듯이 과거 속 수많은 자아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K는 생각한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노래한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는 있는데.. 왜 이 감성 돋는 9월의 마지막 날을 주제 삼은 노래는 없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미 한 달의 마지막 날을 노래하는 것에 대한 생명력은 한 곡이 창조되었을 때 그 효율을 다했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9월의 마지막 날. 생각나는 노래들을 흥얼거려본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무척이나 압박받아 고통받아 절망스러운 고민거리는 없다는 생각에. 행복해하며 박화요비의 그런 일은 내지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불러본다. 하늘도 맑고 공기도 맑아서 그럴까? 내 마음에 큰 고통이 없어서 그런 걸까? 유독 노랫소리가 맑고 투명하게 울려 퍼지는 느낌이다.
'K 너어...! 노래 잘하네?!'
혼잣말로 생각하고 피식 웃어버린 K는 연상작용으로 자기가 잘하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노래.. 아.. 고등학교 때 음악 선생님한테 노래 정말 못한다 지적당했는데..'
'운동? 아.. 무슨 종목이든 대회에 나가면 예선 탈락하곤 했었는데..'
'글쓰기? 아.. 크고 작은 공모에서 매번 떨어지며 칭찬을 해주는 거라곤 엄마 가족 친한 친구. 뿐인데..'
그냥 보통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며 K는 피식 웃어버린다.
보통사람이 가질 수 있는 혜택들이 충분히 많이 있다. 보통사람은 인생을 관객의 입장에서 살 수 있다. 세상 사람들 잘 나가는 거 못 나가는 거.. 세상의 이슈들을 지인들과 이야기하며 놀라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하지만 편의점이나 마트에 가면 활짝 웃으며 주인공 대우해주는 짜릿한 경험도 만끽할 수 있다.
항상 주인공으로 살아야 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에 비하면 훨씬 행복한 삶이다.
K는 유쾌하게 살다가도 가끔 불안해지거나 무언가에 간절해지곤 한다.
내가 변하지 않는다 위안 삼다가도, 주변의 1년 1년 크게 변하는 것들이 많이 있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드니 몸에 아픈 부분들도 많이 생기곤 한다. 내년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할까. 기대도 있지만 불안과 걱정이 더 크다. 아마 이 마음은 평생을 함께 하겠지? 그 평생이 끝나고 난 후 유에서 무로 돌아가고 나면 마치 시험이 끝나고 난 후 홀가분 마음이 들던 학창 시절처럼 편하고 기쁠까? 아니면 더 큰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까? 난 항상 '유'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무'가 될 그날이. 확실히 올 그날이 무척이나 두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인지 다시 잊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항해 기지개를 켠다.
담배라도 피우면 한숨 담배연기 속에 또 한고비 걱정을 흩날려버릴 텐데..
편의점 의자에 앉아 크게 한숨 들이마시는 아저씨를 보며 준비를 한다.
하나..
두울..
세엣...
후~~~~
가라. 걱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