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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하숙생 Aug 17. 2021

오래된 추억을 갚았다

돈빌려달라는 누나의 카톡메시지

2주 전쯤 일요일 오후였다. 더운 날씨가 계속되다보니 저녁준비하기가 귀찮아서 밖에 나가서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차를 몰고 가던 중 카카오톡 메시지가 울린다. 집에서 나온지 얼마 안되었으니 대충 오후 6시쯤이었는데 운전중이라 메시지 내용까지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느낌이 썩 좋지가 않다. 나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대개, 거의, 모두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사람이므로 내가 메시지를 받은 시간은 대략 한국시간으로 오전 7시. 이렇게 이른 시간, 또는 비정상적으로 늦은 시간에 오는 메시지는 심각한 상황이다. 식당에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여윳돈이 있으면 천만원 정도 빌려달라는 얘기다. 가족이라도 성인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 각자의 삶에 대해 속속들이 알수 없지만 우리집의 여자들은-나는 미혼인 누나가 둘이다- 그간 무난하게-금전적으로 누구에게 크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뜬금없이 이렇게 돈 얘기를, 그것도 멀리 미국에 사는 동생에게까지 하는걸 보면 급한 상황인게 분명하다.


평소 단체톡으로 얘기하다가 아마도 돈 얘기를 꺼내기 좀 불편해서 따로 메시지를 보냈겠지만 만에 하나 혹시나 보이스피싱인가 하는 의심도 들어 답장을 보내봤다. 누나들은 씀씀하기 헤프지 않고 번돈은 꾸준하게 투자하여 수익도 쏠쏠하게 내는 편이라 서로 자랑도 하고 밥도 사는 사이였는데 무슨 일이 생겨서 목돈이 필요한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사연인 즉, 전세 갱신할 시기가 왔는데 너무 많이 올랐단다. 누나들 둘다 주식투자로 근로소득 못지않게 과외로 버는 수익도 있는 걸로 아는데 이번에 주식 일부를 처분해도 감당이 안될만큼 전세계약금이 많이 오른 모양이다. 내가 꼭 해줘야 되는지 물어보니 내가 꼭 해줬음 좋겠다는걸 보니 대출 등 다른 방법이 신통치 않았으리라. 예전에 여유자금이 있어서 펀드에 넣어둔 금액의 일부를 환매해서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며칠 시간을 달라고 하고 연락을 마쳤다.

사실 가족간이라도 돈얘기가 오고가면서 즐겁기는 쉽지 않다. 나는 기꺼이 기쁘게 내 계좌에서 달러로 송금을 하고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는 답장을 받고 나서 갑자기 1996년-이미 25년이나 지났음에 스스로 깜짝 놀라버렸다- 언젠가의 기억을 더듬더듬 추억할 수 있었다. 만석군 같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함없이 키우려고 부던히 노력하신 부모님 덕에 시골이었지만 적당히 누릴거 누리면서 자랐고 대학을 서울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된 자취생활. 1년반을 공부도 안하고 흥청망청 보내다 군입대를 앞두고 자취방을 빼고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만들어 마침 큰 누나가 서울에 취직하면서 얻은 서대문구 어딘가의 단칸방에 다 큰 성인 둘이 몇 개월 동안 불편한 동거를 했던-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기억을 찾아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계를 낼 계획이라 아직 학기가 끝나기 전인 5월 내 마음은 이미 학기를 마친듯 했으나 아무것도 없는 시골보다는 빌딩이 즐비하고 매일매일이 활기찬 그 곳 서울이, 고등학교 졸업 후 약 1년반 동안 서울맛(?)을 본 촌뜨기에겐 하루라도 더 머물고 싶었던 곳이었을거다. 그래서 2-3개월 또는 그 이상을 서울에 머물다가 시골에 내려가야겠다고 우기고 우겨서 보냈던 시간이 지금 내게 떠올랐다. 창문은 있었지만 남동향이 아니라 햇볕도 잘 들지 않았고 면적으로 말하면 원룸만도 못한 곳이었지만 그 곳에 있을때 꽤 즐거운 서울생활을 한 것 같다. 예전에 학교 앞에 주인집 할머니 옆방의 자취방과는 달리 어찌되었든 프라이버시는 기본적으로 보장이 되는 곳이었고 다소 칙칙했던 학교주변을 벗어나니 또다른 재미들로 하루하루가 채워졌다.  


그 시절 우리 옆 영문과에는 참 이쁜 여자애가 있었다. 퀸카라고 불리던 애였는데 그야말로 모든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나도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어쩌다 기회가 생겨 말을 트고 지내다보니 내가 그 아이의 주변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되면서 꽤나 가까워졌음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갑자기 가까워졌는지 나같은 오징어를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나는 그 당시 영문과 여학우들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우리 과 쑥맥 남자들에게 적지않은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그야말로 구세주처럼 취급받던 짧은 시절이었다. 그녀덕에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신월동 지리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술마시고 늦게까지 취하면 택시로 그녀를 바래다주며 뻔질나게 드나들기-표현에 오해가 있을수 있어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시작했다. 한동안 꺼내지 못했고 꺼낼 생각조차 안들 만큼 깊이 묻고 못질까지 해둔 그녀와 헤어지기 싫었던 그때의 기억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누나 집에 얹혀 사는 동안 과감하게도 그녀를 방으로 데리고 와 둘이서 꽁냥꽁냥 하던 중에 일찍 퇴근한 누나가 갑작스레 들이닥쳐서 다 지워진 립스틱과 뭉개져버린 파운데이션도 고치지 못하고 후다닥 옷을 챙겨서 쫓기듯 나와 서로를 바라보며 이게 뭐냐고 투덜거렸던 기억은 아직도 웃음이 난다. 그야말로 스무살 촌뜨기의 순수의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고 자연스레 어떤 이유였는지도-아마 나는 군대를 갔고 그녀는 나와의 사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서로가 상처받지 않을수 있는 자연스러운 이별이겠다-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멀어졌고 내가 제대하고 복학을 했을때 그녀는 이미 졸업을 했는지 만날수가 없었고 나도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기로 하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잊었다.


그 시절이 가끔 떠오르는 또다른 즐거운 이유는 아마 먹거리 때문인가보다. 누나의 자취방인 천연동에서 직장인 광화문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누나가 그 거리를 차를 타고 다녔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 튼튼한 다리는 그 정도 거리는 산책삼아 걸을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걷기에 부담스러운 거리였을텐데 젊음은 무모하게도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었다. 광화문 씨네큐브 근처가 직장이었던 누나는 점심시간에 종종 나를 불러내서 점심을 사주곤 했는데 광화문 직장인들에게 인기있는 식당이라면 얼마나 맛있는 곳이었겠는가. 수십군데가 넘는 맛집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어린 동생을 챙겼던 그 마음을 그동안은 누나가 되서 그게 별거냐고 우겨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별게 아닌게 아니다. 광화문과 매치하기엔 좀 어린 나이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정동길을 좋아했고 그렇게 점심을 먹고 때로는 함께 때로는 혼자 덕수궁 돌담길을 걷곤 했다. 나는 그렇게 군대를 갔지만 남초직장의 딱딱한 근무환경, 팍팍한 직장생활을 몇년 더하고 나서 직장을 그만둔 누나를 보면 그 시절 나보다 5살 많은 20대 중반이었지만 그녀의 삶 역시 누구보다 큰 중압감과 삶의 치열함에 몸서리쳤으리라. 지금도 서울에 가면 그 곳을 지나가 보려고 하는데 갈 때마다 조금씩, 어떤 곳은 통째로 변했지만 여전히 그 시절 각각의 날마다 느꼈던 햇살, 구름, 비, 그리고 바람과 맛있게 한그릇, 때로는 두 그릇도 뚝딱 비우던 내 식욕에 대한 행복한 기억들은 여전히 96년 스무살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곳 담벼락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 같다. 바뀌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으면 했는데 갈 때마다 조금씩 바뀌었고 4-5년 전엔가 내가 마지막으로 그 가파른 계단길을 걸어 골목에 들어섰을때 이미 내가 알던 그 파스타집과 칼국수집은 외관만 남아있거나 다른 가게로 변해있음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그 골목을 빠져나와 버렸다.   


막내라는 태생적 한계(?)때문에 지금껏 계속 받기만 하고 되돌려줄 기회가 없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세월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줘서-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 자체가 없는게 최고겠지만- 한편으로는 나라도 여건이 되어 도울수 있다는게 기쁘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것도 안쓰고 몇 개월을 벌어야 될 금액이지만 나는 이번 일을 지금도 여전히 내 주변을 맴돌다 아주 가끔씩 Reminder처럼 소환되는 촌스럽고 어리숙했던 내 20대의 추억 한 조각에 대한 빚갚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제 갚을지 물어보지 않았고 갚지 않더래도 더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또는 아직 결혼하지 않고 살고 있을지도 모를 그녀에게도 소나기같은 기억을 남겨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해질지 조차도 알수 없는 안부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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