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별하숙생 Sep 02. 2021

코로나가 만들어준 그리움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7월 1일 부로 정부가 승인한 백신을 접종한 사람에 한해 자가격리가 면제된다는 소리를 듣고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환호했고 다들 비행기표를 찾아보느라 정신없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 당장은 아니지만 조만간 한국에 들어갈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방역확인 및 추적시스템을 만들고 잘 이행해 나가는 관공서들의 꼼꼼한 준비덕에 7월초에 신청자가 몰려서 담당자들이 격무에 시달리게 되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각종 필요서류들만 잘 챙겨가면 한국 도착 후 어렵지 않게 자가격리를 면제받을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7월 중순, 하순을 지나면서 휴가 인파와 그 속에서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확진자 1,000명을 넘어서고 8월에는 1,500명을 지나 8월 중순에는 확진자가 2,000명에 근접하면서 4단계 방역지침이 시행되고 6시 이후에는 2명을 초과하는 모임은 생각조차 할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몇 가지 옵션을 예약해두고 저울질 하고 있던 나는 한국행을 내년으로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한국행을 포기하면서 가장 아쉬운건 가족들을 볼수 없는 것이지만 친구들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불편한 일이다. 한국에 다녀온지 거의 3년이 되어가다보니 매년 의무적으로 한국에 가던 때와는 다르게 한국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더 애틋하다. 내 나이쯤 되면 친구들 만날 시간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우선이라 친구에게 시간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는 항상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마흔이 넘어서 무슨 친구타령이냐고 한다면 사실 나도 친구 많은 편은 아니고 이러나저러나 항상 한결같았던 사람들이 결국엔 지금도 내 곁에-물리적이 아닌 정신적으로 가까운 곳에- 머물러 간간히 안부를 전하고 있다. 언제 그를 처음 만났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중학교 때, 그것도 마지막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나보다. 그리고 같은 고등학교에 갔고 매년 같은 반은 아니지만 계속 가깝게 지냈고 입시준비에 바쁜 고등학생이었지만 가끔 좋은 음악과 서로의 생각에 대해 얘기할만한 시간들을 그와 함께 할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와 나는 작은 모임이었지만 독서토론서클을 함께 했고 한달에 한번이었던가 마음맞는 남자고등학생과 여자고등학생들이 모여서 책을 읽고 토론모임도 함께 했었는데 아마 그와 가깝게 지내게 된건 지금은 어렴풋할 정도로 내 기억속에서 이미 희미해져버린 그 독서토론모임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지만 나는 '서울애들'과 어울리느라 나와 꽤 가까운 거리에 살던 그와 더이상 함께 할수 없었고 그는 아마 나의 다른 친구를 통해 내 소식을 전해 들었던거 같다. 그렇게 군대를 제대하기 전까지 고등학교 때 꽤나 친했던 친구들과는 매일같이 삐삐가 울려도 연락을 받지 않고 그렇게 서먹해졌나보다. 그리고 제대를 하고 그 녀석을 만난건 그가 살던 노량진 자취방이었다. 단독주택 2층의 15-6평 쯤 되는 세대였는데 처음엔 여동생 한명과 살다가 나중에는 둘째 동생까지 서울생활에 합류하면서 말그대로 자식들이 모두 상경하게 되었는데 그는 어엿한 장남으로 동생들을 건사하고 있었고 내가 갈때마다 허름한 부엌에서 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곤했다. 그 당시 그에게 재미있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가 차려준 밥을 한참 맛나게 잘 먹고 있는데 스스로 자신의 음식에 대해 비판을 하곤 했는데-아, 양념을 더 넣었어야 했는데 좀 싱겁네, 좀 덜익혔어야 됐는데 야채가 좀 무르네 등등 내가 미쳐 느끼지도 못한 디테일을 스스로 잡아내곤 했다- 요즘 내가 집에서 요리를 하면서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걸 보니 혹시 먹는 사람이 음식을 맘에 들어하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노파심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의 습성인가보다. 그렇게 몇해를 보내고 그는 노량진보다 더 좋은 홍대근처로 이사를 했고 나는 그의 방에 더 자주 놀러가게 됐는데 그야말로 아지트가 되었다. 그럭저럭 괜찮게 조립된 컴퓨터와 그에 연결된 작은 2.1채널 스피커, 그 안에 설치된 음원들과 음악플레이어, 작지만 그럭저럭 볼만했던 TV, 나중에는 플레이스테이션까지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이 모두 가능했고 작은 상에 식사는 물론이고 간단히 술상도 봐주던 그의 인정에 어지간해서 외박을 하지 않던 나도 가끔은 그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잠을 자곤 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그와 내가 더 각별해진건 아마도 내가 전역한 후 그가 자신의 여자친구의 친구를 내게 소개해주었고 나 역시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고 내 친구 커플과 함께 더블데이트를 하면서 보낸 짧지만 임팩트있는 시간때문이리라.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한건지 너무 귀여워서 나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고 했던 그녀가 한동안 보고파서 그 친구에게 술을 청한게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렇게 나의 말동무가-그 역시도 그의 이야기를 알고 공감할 누군가가 필요했었다고 확신한다- 되어 주었다. 그 후로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이 나도 그도 그 시절 얘기를 따로 한적은 없지만-너무 깊은 상처는 누군가 보고 어루만지는것 조차 싫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각자의 상자에 담아두고 가끔 혼자 꺼내보리라 생각한다. 


그에게는 이런저런 사연이 있어 다른 친구들에 비해 졸업도 늦고 취직도 늦어졌지만 그는 그렇게 열심히 사회생활에 적응하고 있었고 나도 겪었던 사회초년생 시절을 그만의 방식으로 헤쳐나가고 있었다. 업계에서 상위권인 회사였지만 소위 '워라밸'의 불균형이 심각했던 첫번째 직장을 3년만에 그만두고 몇 번의 이직을 거쳐 그나마 맘에 드는 직장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의 직장이 내가 외근나가는 동선에 있다는걸 알고 나는 가끔 그에게 전화해서 점심식사를 함께 하곤 했다. 서로 취미도 달랐지만 각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좋았던 얘기, 안좋았던 얘기들이 잘 버무려져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흘러갔다. 나는 돌아다니는걸 좋아했고 피상적인 얘기로 들리겠지만 해외파견근무나 해외취업 등을 막연히 꿈꾸긴 했지만 그런 기회는 나에게 오지 않았고 그는 돌아다니는걸 좋아하지 않고 정적인 사람이었으나 직업의 특성상 해외에 나갈 일이 빈번했지만 그때마다 피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시점은 다르지만 나는 직장도 없이 미국에 와서 맨땅에 헤딩을 시작하게 됐고 그는 갑작스레 미얀마로 원치않는 파견근무를 가게 되었다. 그렇게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건 2017년 봄, 구로디지털단지 어딘가의 식당이었다. 간간히 그는 한국에 오가긴 했지만 나와 시간이 맞지 않았고 서로 메시지앱으로 안부를 전하고 생존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코로나 발병 이후에는 만나는건 고사하고 한국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여전히 코로나 일일 확진자가 1천명을 훌쩍 넘어서 한국에 가더라도 행동에 제약이 많아서 코로나 상황이 잠잠해 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에 가서 예전처럼 시간을 보내는 일은 쉽지않아 보인다. 순간의 작은 디테일도 지나치는 법이 없는 그의 섬세함, 나의 보잘것 없는 시화전 작품을, 나 조차도 중학교 때 인지 고등학교 때 인지 가물가물한 그 시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시덥지 않은 얘기를 해도 항상 귀기울고 의미를 찾던 그를 못본게 어언 3년이 넘었다. 나 못지않게 땀을 많이 흘리던 그 친구, 그가 뜨거운 미얀마에서 더 많은 땀을 흘리진 않는지, 그리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곳에서 안전한지 궁금함과 동시에 그와의 소주 한잔, 그리고 그와 대화할때마다 느끼는 오타쿠같은 집요함이 그리운 오늘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