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 퇴근, 지옥 출근

퇴사하는 기분

by 지구별하숙생

지난 해를 돌아보긴 많이 늦은 감은 있지만 2024년은 나에게 조금 바쁘고 나름대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두괄식으로 가장 큰 변화를 말하자면 앞으로의 정신적 평화를 위해 드디어(?) 회사를 그만뒀다는 점이다. 작년은 예년보다 바쁜 시기였고 내가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시기를 잘 만났는지 상반기에는 제법 바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일본계라 3월 회계 마감이라 4월에 새로운 회계년도 시작, 10월이면 반환점을 도는 식인데 그래서 9월 말과 3월 말에는 직무평가(Evaluation)로 무척이나 예민하고 긴장되는 시기다. 뭐가 잘 안되려고 하니 그런건지 재작년부터 직무평가가 박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직무평가가 연봉협상에도 영향을 미치다 보니, 업무적 스트레스뿐 아니라 회사 내부적으로 불만이 쌓여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로의 전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사다니면서 뭣도 모른 채 사업자 등록을 내고 활발하진 않았지만 혼자 비즈니스를 몇 년 해보니 남이 만들어둔 챗바퀴를 돌릴게 아니라, 내가 만든 챗바퀴를 나 자신을 위해 굴리고 싶어졌다는 식의 명분을 스스로 만들긴 했지만 그 계획을 실행하기까지는 말할 수 없이 많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보니 우연히 한국 거래선의 요청으로 부업삼아 일감을 받게 되어 개업을 한게 벌써 햇수로 8년이 되고 처음 3-4년 정도는 매출도 거의 없는 껍데기뿐인 회사였다가 실제로 고객사를 발굴해서 거래를 시작한게 코비드 이후, 약 4년쯤 되었으니 이제는 스스로 선택의 시간이 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울고 싶은데 뺨맞았다는 말처럼, 그렇지 않아도 언제 퇴사할까 각을 재고 있던 참이었는데 중간 직무평가에서 그 방아쇠가 제대로 당겨졌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이 남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보다 대개 조금 낫겠지만 매번 그 차이를 넉살좋게 받아넘기기에는 임계점을 한참 넘어버렸다.


조금 화가 나는 부분은 직무평가가 끝나고 그 다음 날 부터 예정된, 여름에 제대로 쉬지 못해 가을로 넘겨버린 늦은 휴가를 시작부터 망쳐 버렸다는 점이다. 자세히 얘기하긴 어렵지만 박한 직무평가는 남은 6개월 동안 어떻게 노력해서 보완한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직개편 소식까지 듣고 나니 설레는 마음으로 떠난 유럽여행에서 계속 머리속에 맴돌아 화가 나서 생각보다 재미있게 보내기 어려웠다. 그렇게 2주간 휴가를 즐기고 마음의 결정을 하고 돌아와서 1주일 정도 마음의 정리를 하고 회사에 퇴사를 통보했다. 재미있는 것은 보통 회사에 퇴사를 통보하면 왜 그만두는지 물어보고 인사기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무런 추가질문 없이 퇴사처리가 진행되었다. 아마 부서장 스스로도 억지로 끼워맞춘 조직개편과 인사조치를 하고 난 직후에 퇴사를 통보받았으니 퇴사 이유가 너무 뻔한데 이유를 묻는 자체가 속보이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나에게 잘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퇴사를 해서 괘씸하게 느낀건지 지금까지는 누가 떠나도 송별회(Farewell Party)나 점심식사 정도는 했는데 나는 운좋게도(?) 불편한 이들과 아무런 작위적인 이벤트없이 떠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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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024년 11월 부터 월급쟁이에서 오너가 되었다. 첫 1주일은 해방된 느낌에 마냥 좋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내 머리위에는 우산(Umbrella)가 없는 허허벌판에 서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용카드를 척척 긁어도 여유가 있었지만 더이상 화수분 같지 않은 내 통장을 털어 모두들 바빠서 어지간하면 방문하길 원치않는 연말 12월과 연초 1월을 공급업체와 고객사를 방문하는 데 보냈다. 몇 개월 안됐지만 회사다닐 때와 크게 달라진 부분들 몇가지를 말해보면,


첫째, 출근을 하지 않는다.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자칫 헤이해질거라 생각하겠지만 나 스스로를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되고 나만의 근무시간과 휴식시간 등 규칙을 정해두고 일을 한다. 9시에 업무시작, 4시에 업무마감, 점심시간은 12시부터든 1시부터든 1시간 등이 기본 규칙이고 가급적이면 업무 외적인 일들은 업무시간에 하지 않는다.


둘째, 누구도 업무적으로 나를 푸시하지 않고 괴롭히지 않는다. 내가 오너니까 아무도 내를 제재하지 않는건 당연한거지만 내 상사대신 나를 괴롭히는건 의외로 나 자신, 그리고 회사 통장잔고다. 일하지 않으면 내 주머니가 얇아지므로 생계를 유지하고 삶을 유지하려면 계속 일하고 일할 거리가 없으면 스스로 찾아나서야 한다. 3개월 정도 해보니 실제로 바쁠때도 있고 일이 없을 때도 있는데 일없는 한가한 시간에는 그동안 진행했던 과정을 정리, 복습하고 새로운 시장 개발을 위한 조사를 해야 한다.


셋째, 퇴사할 때부터 몇번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우습게도 수입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한동안 거래처에서 발주가 없으면 마음이 우울하다가도 거래처에서 송금해주는 날, 또는 우편으로 Check이 올 때는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생각보다 좋은 점은 흔히들 회사는 전쟁터, 회사밖은 지옥이라는데 지옥치곤 괜찮다는 점이다. 나는 어쩔수 없는 명예퇴직자도 아니고 후배들에게 밀려서 회사를 나와 치킨집이나 요식업으로 전환한 경우가 아니고 적어도 3-4년 동안 동종업으로 워밍업을 한 상태라 커리어 전환 시의 충격이 적은 편이라 심적 부담이 덜한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한 곳을 선택했고 집중을 해야할 시간이다. 지옥에서 살아남고 지옥을 즐길 일만 남았다. 지금도 삶을 위해 일하는 모든 직장인들, 자영업자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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