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별하숙생 Jun 09. 2021

유상철이 떠났다

월드컵 영웅과의 작별

유상철 전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투병중인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훅 들어온 비보에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뭐 내가 유상철 감독과 무슨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아니오"라고 답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상실감을 밀어내기가 힘들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이런 감정들에 나이가 먹어서 그런가라고 되물어보아도 그건 아닌것 같고 유상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내 인생을 관통하는 여러가지 사건과 이벤트 중에 축복과도 같은 한가지-개인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고 나와는 다를수 있겠지만-가 있다면 아마 2002년 월드컵이라고 말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학생으로 졸업을 앞둔 그 시절,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아시안게임 외에는 이렇다 할 굵직한 스포츠 경기를 개최할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드디어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을 개최하게 되었다. 월드컵 개최로만으로도 충분히 들뜰만한 일이지만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할만한 축구실력을 보여주며 당당히 4강에 올라섰고 그때는 정말이지 온 시내가 붉은 악마의 물결이었고 광화문과 올림픽 공원등에 모여 한국팀을 응원하고 사람들이 도로로 쏟아져 나와도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클락션으로 붉은 악마의 박수소리에 화답했던 그 시대는 아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흥겨운 신화의 첫 단추에 바로 유상철이 있어서 그의 비보가 더 슬프게 느껴지나보다. 한국의 첫 경기는 폴란드와의 예선전. 폴란드는 유럽의 강호는 아니지만 강팀이 즐비한 유럽에서 경쟁을 뚫고 본선에 진출했다는 것은 한국이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라는 것이고 두덱이라는 유럽최고의 걸출한 골키퍼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뭐가 잘 풀릴려고 그런건지 매번 월드컵에만 나가면 슛이 하늘로 날아가 국내용 선수라는 불편한 별명까지 붙은 황선홍이 그간의 오명이라도 씻어내려는 듯, 그리고 맏형으로써 마지막이 될 월드컵에서 첫 골을 개시하면서 깔끔하게 출발을 한다. 하지만 1:0이라는 스코어는 공은 둥글다는 축구에서 많이 나오는 말처럼 한 골이면 언제라도 승부가 바뀔수 있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다. 그 살얼음판에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골을 넣은 선수가 바로 유상철이었다. 유상철의 멋진 중거리슛에 골키퍼 두덱이 방향을 잡고 몸을 던졌지만 그의 손을 맞은 공은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골망안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번째 골을 넣고 한국대표팀은 월드컵 출전 사상 첫 경기 승점 3점을 따내는 한국축구의 쾌거를 달성한다. 그리고 장발은 아니지만 그가 조금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골 세레머니를 하고 관중들을 북돋우는 장면은 지금 봐도 참 짜릿하다. 잘 되는 집은 뭘해도 잘 된다는 말은 아마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표현하는 말이었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배, 후배가 잘 어우러져 그야말로 진정한 Teamwork과 투지가 뭔지 보여준, 모든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4강에 오를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토트넘핫스퍼 인스타그램
맨체스터유나이티드 인스타그램

내가 누렸던 월드컵 때의 즐거움을 옆으로 밀어두고 생각해봐도 유상철의 떠나감-죽음이라는 어감이 다소 슬프게 느껴져 좀 어색하지만 떠났다고 표현하려고 한다-이 두고두고 아쉬운 것은 그가 매우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일것이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년배 내지는 동네, 또는 학교의 친구같은 느낌-실제 유상철은 나보다 한참 형이지만 나는 그 또래의 선배형들과 대학시절 친하게 지냈다-의 유상철이, 이렇게 빨리 우리 곁을 떠나간다는게 조금은 믿기지 않아서 더더욱 아쉽고 또 아쉽다. 이런 비보를 접하게 되면 20대, 30대 때는 꽤나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 더이상 멀지 않다고 생각되어 막연한 무서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뭉치면 찬다'라는 프로그램을 떠나면서 약한 모습 보이기 싫다고 건강하게 암을 이겨내서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은 비록 지키지 못했지만 4-8개월 정도의 수명밖에 기대할 수 없는 췌장암 4기에서도 2년 동안 생존하며 누구보다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거의 20년 정확히는 19년 전이지만 여전히 경기장면을 볼때마다 설레고 지금도 친구들과 그 당시를 추억할 수 있게, 온 국민을 환호하게 만들어준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 선수, 그리고 암 발병에도 불구하고 강한 투병의지로 인천유나이티드를 1부리그에 잔류시킨 감독, 유상철에게 감사하며 그의 영면을 기도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유상철 선수


작가의 이전글 미국에서 회사를 가져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