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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Oct 12. 2021

[자서전 편지 #14] 진흙눈동자 속 '그리운 아버지'

올해 84세인 어르신께서 자서전을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1937년생이니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보다 한살 많으신 분이다. 면목동에서 태어나 의대를 졸업한 뒤 30여 년 동안 동네에서 의사로 사셨다. 현재는 캐나다에 거주 중이다.


달콤제빵소라는 카페에서 만나 한 시간 여 얘기를 나눴다. 보통의 자서전은 인생 전반을 담으려 하는데, 어르신은 태어나서 군대 제대 후 레지던트로 근무하기 전까지 기록하고 싶어하셨다. 일제시대 소학교, 해방, 한국전쟁, 의대 입학, 군 복무 과정의 이야기를 노트에 빼곡히 적어왔다.


어르신이 하고자 하는 말씀은 춥고 가난한 시절 부모님이 자신을 어떻게 가르쳤으며,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얼마나 힘겹게 공부를 했는 지를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다. 지금도 의대를 보내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는데 한국전쟁 후 상황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손 떨림이 있어 글씨를 쓰는 데 어려움이 있음에도 한 자 한 자 새기듯 쓴 노트를 보면서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평생 농사를 지으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까지 백내장을 앓으면서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대신 해마다 대문 옆에 눈에 좋다는 결명자를 심곤 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꼭 떠오르는 시가 나희덕 시인의 '진흙 눈동자'다.  



진흙 눈동자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신다

아버지, 부르면

그제야 너 왔냐, 웃으신다


갑자기 식어버린,

열려 있지만 더 이상 피가 돌지 않는

저 눈동자 속에

어느 손이 진흙을 메워버렸나


괜찮다, 한 눈은 아직 성하니

세상을 반쯤만 보고 살라는 모양이다

조금씩 흙에 가까워지는 게지,

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씀하신다


고요한 진흙 눈동자,

그 속에 앞산의 나무 몇 그루 들어와 있다



84년이면 천왕성의 자전 주기와 같다. 천왕성에서는 42년이 낮이고, 42년이 밤이다. 천왕성의 하루가 인간에게는 일생이다. 그 짧은 시간에 손이 떨리고 눈이 점점 멀어지면서도 자식에 대한 사랑의 끈은 놓지 않으려 한다. 작은 것들을 더 소중히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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