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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Oct 15. 2021

[자서전 편지 #15] 별자리는 천천히 예약해도 돼요

성당 대부님과 함께 설악산 단풍 산행을 하기로 하고 사전 연습차 어제 새벽 용문산 백운봉을 올랐습니다.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대부님 등산화 밑창이 빠져버렸습니다.


밑창 빠진 등산화를 난생 처음 봤는데,거의 스키화 수준이랄까. 바위에 닿기만 해도 미끄러져서 중간 약수터에서 초코파이 하나씩 먹고 하산을 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따르릉 울리는 대부님 전화, "요셉씨, 우리 장모님이 요양병원에서 퇴원을 했는데 온몸이 멍투성이야. 거기서 맞았대나 봐. CCTV를 확인하고 싶은데......"


폭행이라는 것이 쌍방의 입장을 들어봐야 하는 것이라서 조심스럽게 "우선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은 후 경찰서에 사건 접수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오전에 대부님의 빙모상 문자를 받았습니다.


문득 어제 산행에서 신발 밑창이 벗겨진 것이 떠올랐습니다. 참으로 희안하기도 하지, 왜 밑창이 벗겨졌을까. 오랫동안 기 수련을 하신 분에게 물어보니 "접착 본드가 떨어진 것 같은데..."라며 확대해석 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랴부랴 옷을 입고 장례식장에 가니 대부님과 대모님이 침통한 표정으로 맞이합니다. 구순의 연세이기는 하지만 부모를 여의는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거지요. 상가에 가면 꼭 떠오르는 유홍준의 시가 있습니다.



상가에 모인 구두들


저녁 상가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은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북천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지금은 화톳불 펴놓고 돼지고기를 삶지는 않지만 신발이 어지러진 상가의 풍경은 똑 같습니다. 요즘은 집게로 조문객의 신발을 정리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밟고 찌그러진 구두인들 어떻습니까. 그 구두를 신고 밤하늘 초승달과 별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죠. 자신의 별자리는 천천히 예약해둬도 됩니다. 인생 참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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