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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Oct 21. 2021

해피엔딩 사랑의 신파 ‘너 없는 봄날, 영원한 꽃이..

아침부터 사무실 문을 부술 듯 두드리는 소리.


“등기우편 왔습니다”


내용물을 뜯어보니 봉투 속에 새침하게 들어있는 시집 한 권. ‘너 없는 봄날, 영원한 꽃이 되고 싶다’


“김저녁꽃) 작가님께, 조촐하게 차린 이 시의 밥상이 맛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21. 가을날 이창훈


오늘 브런치에서 댓글 이벤트로 받은 책이다. 책을 받으면 리뷰를 쓰기로 해서 참으로 오랜만에 시평을 쓰게 됐다.


제주에서 태어난 이창훈 시인은 섬을 떠나면서 사랑의 항로에 나침반을 맞춘 듯 하다. 스스로 서문에서 “풍요보다는 사랑의 길을 선택한 자”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익히 짐작이 간다.


처음 서울에 와서 지하철역에서 “사랑을 아십니까”라고 누가 물으면,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 갔을 것이다. 그에게 사랑은 도(道)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사랑을 이렇게 정공법으로 공략하는 시인을 오랜만에 봤다. 어떻게 보면 진부할 수도 손발이 오글거릴 수도 있는 사랑의 발설을 그는 거침없이 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기 때문이다.


“먼 곳의 너를/더 이상 볼 수 없어//듣는다/눈 감고 너를 듣는다(음악)”


마치 윤제림 시인의 ‘사랑을 놓치다’를 연상케 하는 이 대목은 눈먼 장님이 되어 그대가 오는 길목에 서서 종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그러고 나서 바로 부재의 연인을 향해 한탄을 쏟아 붓는다.


“꽃이 되고 싶었다/꽃으로 피고 싶었다//너 만의 꽃이 되어/네 눈 속에/네 가슴 한복판/너만의 꽃으로 피어나고 싶었다//……//너 없는 봄날/너에게 영원한 꽃이 되고 싶었다”(造花)


사실 시인에게 봄날과 꽃은 모순과 부조화의 상징이다. 너 없는 봄날을 견딜 수가 없으므로, 영원한 꽃이 되고 싶다고 거짓 고백을 하는 것이다. 꽃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시인은 종이로 만든 꽃(조화)이라도 되어 사랑하는 이의 곁에 머물고 싶다고 말한다. 이 무슨 조화인가.


하지만 그런 사랑의 대가는 냉혹하다. 못이 박힌 나무가 되레 “괜찮다”를 연발하듯 모든 시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당신을 사랑하려면 칼을 물어야 했다//한 그루 나무가/제 가슴 한 켠에 시퍼런 도끼를 허락하듯이”(도마)


대처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닌 독감처럼 지독하게 앓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국지성 폭우를 맞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껏/나의 사랑은/그런 것이었다//서서히 젖을 새도 없이 젖어//세상 한 귀퉁이 한 뼘/처마에 쭈그려 앉아//물 먹은 성냥에/우울한 불을 당기며//네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던,”(폭우)


그러면서도 사랑의 언약을 저버릴 수는 없다. 사랑의 사육신이 되어 수양대군이 “내가 백성들로부터 사랑 받을 상인가, 사랑 받을 상인가 말이다”라고 인두로 지져도 할 말은 한다. (이 수양대군은 600년 후 '오징어 게임' 주연 배우로 환생한다)


“네게 사랑을 받을 수 없는/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다//내가 사랑할 단 한 사람이/더 이상 없어서다”(통증)


“사랑이 져도/사랑이 진 적은 없어//잊을 수 없네/잃을 수 없네//꽃 진 자리/신열처럼 피어나는/그리움 이길 수 없네”(꽃)


여기까지가 시집의 1부 이야기다. 이 대책 없는 사육시인은 고슴도치 가시 같은 사랑의 무기를 2부부터 마구 휘두르다 부메랑을 맞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의 화살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향할 때 시인의 시는 더욱 빛이 난다.


“내겐 하지도 못한/마석 가구공단에서 왼 손목을 잃은 아버지와/농협 옆 하나로마트 계산대에 늘 서 있는/어머니의 고단한 일상과 사랑을,/거기에 늘 틱틱대기만 하는 엇박자인/못난 자신의 부끄러움을 상처를/반 친구들에게 어눌하지만 또박또박/누구보다 당당하게 얘기했던 아이/듣는 우리를 오히려 울컥하게 했던 아이”(‘희주’ 중에서)


사랑이 관념 속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에 있을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리라. 시인은 오늘도 아이들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토론을 하면서 보낸다. 그가 젊은 시절 사랑을 잃고도 학교 의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리고 싶지 않다/다들 빠르게 걷고 뛰어도//나는 지금 여기에 서 있거나/앉고 싶다//꽃 피는 소리를 들으며/사랑의 시를 읽고/지는 꽃잎을 보며/오롯이 누군가의 발걸음을 떠올릴 것이다//……//내 안으로 서서히 들어갈 것이다”(‘의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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