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여행은 당연하지 않다.
여행의 기회는 생각보다 귀하다. 돈과 시간만 있다면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게 여행인 것 같지만, 사실 여행이 이렇게 자유로워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시기가 훨씬 더 길다. 여행 인프라가 부족한 곳이 많아서 여행이 ‘고행’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고, 국가 간의 사상과 안보 문제 등으로 여행이 허락되지 않던 시기도 있었다. 저 멀리 조선 시대 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대한민국 역사만 봐도 80년대까지는 국가의 허락 없이 해외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로, 이제 3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잠시 국경이 막히긴 했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든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이동은 자유롭고 교통과 여행 인프라도 발전했다. 저가 항공도 많이 생겨서, 정말 마음만 먹는다면 가까운 나라는 당일치기나 주말을 이용한 1박 2일 여행도 다녀올 수 있게 됐다. 입국 비자 등 행정 절차도 대폭 간소화됐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우리나라 여권을 가지고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나라는 189개국에 달했다. 비행기 표만 구한다면 대부분의 나라로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잘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나도 그랬다. 이번에 안 가면 나중에 가면 되고, 시간과 비용을 쓸 각오만 한다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 말고 나중에, 상황이 좀 더 좋아지면, 언젠가. 이렇게 쉽게 여행을 미루곤 했다.
여행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여행의 순간, 모든 것이 낯선 세계는 당신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기 어려울 수많은 감상과 기회를 선물할 것이다. 당신이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당신의 기존 지식이나 심리상태와 만나며 뜻밖의 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작용은 당신이 삶의 어떤 때를 지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환경과 시기를 살고 있느냐에 따라 여행의 경험이 미치는 영향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풍경을 봐도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의 감상은 다 다르다. 여행이 주는 유익은 여행의 순간 당신의 상태와 그날까지 쌓아온 당신의 인생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청년이 아무리 여행을 해도 노년의 여행자가 느끼는 그 감상과 깨달음을 알 수 없고, 같은 여행지에 가더라도 어린아이와 부모가 받아들이는 자극이 다르다. 어른들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평범한 풍경도 아이의 눈에는 정말 신기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 그때에만 느낄 수 있는 여행의 매력과 효용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올여름 여행이 그냥 즐거운 휴가로 끝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게 인생을 바꿔 놓는 경험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어떤 ‘때’는 비용보다 앞서기도 한다. 외할머니와 다녀온 내 대만 여행이 그랬다. 어린 시절,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서 우리 남매를 돌봐준 건 외할머니였다. 당시 외할머니는 작은 슈퍼마켓을 하셨는데, 가게를 보시면서도 엄마가 퇴근하기 전까지 우리를 살뜰히 보살폈다. 그런 할머니가 팔순이 되셨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외할머니와 제대로 여행을 가본 적이 없더라. 나는 이 나라, 저 나라 그렇게 돌아다녔으면서, 한 번을 외할머니와 함께 여행 갈 생각을 못 해봤다는 게 죄송스러웠다. 우리는 외할머니의 팔순을 맞아 함께 대만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비용도 시간도 여유롭지 않았다. 나만 놓고 봐도 결코 여행 갈 때가 아니었다. 일은 바빴고, 회사 문제로 스트레스도 심했다. 가족들 모두 바쁘고, 빡빡하고, 정신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시간을 내는 일도, 비용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각자의 상황을 따져볼수록, 이 여행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꺼이 이 무리를 감수하기로 했다. 외할머니의 연세는 벌써 80이었고, 감사하게도 아직 거동에 큰 불편은 없으시지만 종종 넘어지셨고, 걷기를 힘들어하셨다. 이번에 안 가고 다시 한 해 두 해 미루다가는 외할머니와 제대로 된 여행을 못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여행은 즐거웠다. 외할머니는 눈을 반짝이며 온갖 풍경을 바라봤고, 낯선 음식도 기꺼이 시도했다.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고, 지인들에게 줄 선물도 사셨다. 진과스의 커다란 금덩이에 손을 얹었다가 주머니에 쏙 넣으며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하고, 스펀에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천등 한쪽에 삼촌 얼른 장가가라고 적기도 하셨다. 대만 온천은 탕이 왜 이렇게 작으냐며 한국 목욕탕과 비교하는 말을 한참 쏟아 놓다가도, 온천을 하고 나니 뚝 떨어진 감기 기운에 그 온천 효과가 좋다고 금세 칭찬을 하기도 하셨다. 외할머니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낯선 세상에 반응했다. 팔순의 여행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여행을 할수록 막연히 ‘할머니’라고 인식하고 있던 존재가 ‘양명자’라는, 여행을 즐기는 한 명의 사람으로 또렷해졌다.
타이베이 교외 여행을 하고 숙소로 돌아온 날 저녁, 노란 소파에 앉아 쉬고 있던 할머니께 말을 걸었다.
“할머니, 가족들이랑 해외여행 오신 거 처음이에요?”
“응, 처음이지.”
“여행 재밌으세요?”
“응, 좋아.”
뻔한 질문에 으레 해주시는 대답일 수도 있지만, 기뻤다. 어른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라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고, 비용도 혼자 여행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들었지만, 그런 건 정말 괜찮았다. 80년이라는 외할머니의 삶에 무언가 첫 경험을 만들어 드렸다는 게 기뻤고, 그걸 좋다고 해주시니 또 기뻤다. 팔순 할머니의 여행은 어떤 감상을 만들어 냈을까. 팔십 살에 하는 첫 해외여행은 어떤 느낌일까.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 순간에 내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의미 있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할머니와 이 여행 이야기를 두고두고 재밌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작, 할머니가 좀 더 건강하실 때 더 많이 모시고 여행을 다녔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조금 무거워졌다.
올해 내내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행은 당연히 엄두도 못 내는 상황.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만약 작년에 바쁘고 비용이 부담된다며 여행을 미뤘다면 외할머니와 함께 해외여행을 해보기는 더 어려웠을 거다. “그냥 내년에 가자”, “다음에 가자.”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쉽게 여행을 미룬다. 하지만 그 ‘다음’은 생각보다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외할머니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이 한 해만 늦어졌어도, 우리는 여행을 갈 수 없었을 거다.
여행을 가는 ‘우리의 시간’ 외에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여행지의 시간’이다. 내 사정과 상관없이 사회는 변한다. 그 변화 속에서 여행지의 모습이 바뀌기도 하고, 여행 환경 자체가 달라지기도 한다.
예전에 온라인 여행 커뮤니티에는 가끔 시리아를 추천하는 글이 올라왔었다. 대부분 터키나 요르단 여행과 묶어서 함께 다녀왔다는 후기였는데, 풍경도 유적도 참 예쁘고, 사람들이 친절하며, 음식이 맛있다고 했다. 그 후기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 터키와 시리아로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대학 동기들이 그쪽으로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때 선뜻 합류하지 못했다. 학생이라 돈이 항상 빠듯했는데, 왠지 중동 지역 여행은 비용이 좀 여유로워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지금 가면 돈 아낀다고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힘들기만 할 것 같아’라는 이상한 믿음에 사로잡혀 그 기회를 그냥 보냈다. 졸업하고 돈 벌면, 그때 좀 더 여유 있게 다녀오자. 그렇게 생각하고 여행을 미뤘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내가 시리아를 여행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2011년 시리아에 내전이 터진 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나라 밖으로 탈출한 난민들도 1,200만 명에 달한다. 이는 내전 이전 시리아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는 수치다. 또한 시리아가 자랑하던 아름다운 건물과 유적지들도 거의 다 파괴되었다. 시리아는 현재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지정한 여행 금지국가다. 이제는 돈과 시간이 생겨도 시리아에 여행 갈 수 없고, 다시는 예전 모습을 볼 수도 없다. 시리아에 평화가 찾아온 뒤 여행의 기회가 생기더라도, 그건 전쟁 이전의 시리아와 많이 다른 나라일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 때문에 전 세계가 멈춰서는 상황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북적거리던 공항은 찾는 사람이 없어 한산해졌고, 쉼 없이 뜨고 내리던 비행기들은 공항에 묶였다. 코로나 사태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고, 언제 다시 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 여행업계가 모두 멈췄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맘 편히 여행 다녔던 그 시기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매우 드물던, 기적 같은 시기였다. 다양한 항공편, 많은 여행지, 잘 정돈된 여행 인프라, 무비자로 다닐 수 있는 수많은 나라, 비교적 안전했던 나라들. 일부 나라를 제외하고는 전염병 같은 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예방접종을 하거나 약을 준비해가면 큰 문제가 없었다. 여행이 쉽고 당연하던 때. 내가 누리고 있는 게 귀한 것인 줄도 모르고, 얼마나 평범하고 당연하게 취급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고 누리던 여행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언제 다시 그 시기가 시작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여행의 때는 정말 귀하다. 그때가 항상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개인의 시간도, 사회의 시간도 계속해서 흘러간다. 물론 개인의 경제적 형편과 사회적 책임을 넘어서는 무책임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여행의 기회가 귀한 줄 모르고 놓쳐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행은 일상생활에서는 쉽게 얻기 힘든 귀한 경험과 생각을 하게 해주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없을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기도 하며, 삶에 짓눌려 숨이 막힐 때 그 마음을 위로하고 용기를 심어주기도 한다. 거기다가 이 기회는 드물기까지 하다. 그러니 여행의 시간, 여행의 때가 얼마나 중요한지 기억하자. 그리고 그 기회가 다시 우리 손에 주어진다면 최대한 꽉 붙잡자.
언젠가 다시 여행의 때가 올 것이다. 소망하기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이길 바란다. 그때까지 다시 찾아올 여행의 때를 기다리며 준비해보자. 어느 날 갑자기 기회가 주어졌을 때 멈칫거리다 놓치지 않을 수 있게, 지금의 일상을 더 열심히 사는 거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됐을 때,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을 만끽해야지.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