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계획이 참 많다. 언제까지 무얼 하고, 어떻게 할지를 수없이 계획하고, 적고, 동동거린다. 그런데 막상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게 열심히 짠 계획에 비해서 많이 엉성하고, 느렸다.
학업과 직업 경력에서도 창피할 만큼 많이 실패하고 실수했다. 학창 시절 흔히 있는, ‘열심히는 하는 거 같은데 그에 비해 성적은 썩 좋지 않은 학생.’ 그게 딱 나였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곳은 언제나 내가 뛸 수 있는 거리보다 멀리 있었다. 그래도 욕심을 부리며 달려들었고, 당연히 아주 많이 넘어졌다. 한 번에 멋지게 착지하는 일이라곤 단 한 번도 없었다.
열심히 하는데 잘 안되는 애
대학생 때, 영문과에 들어가면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말에 덜컥 신청했던 영문과 전공 수업. 이쯤 되면 다들 예상했겠지만, 나는 수강 신청도 잘 못 했다. 허둥허둥 버벅거리다가 타과생들을 위한 수업 신청은 실패하고 영문과 학생들과 같이 듣는 수업에 들어가 버렸다. 문법 수업 시간, 영문과 학생들 사이에서 기죽어 있는 타과생을 위해 교수님은 쉬운 질문을 하나 던지셨다.
“자, 본동사가 have인 현재완료형이니까 여기, have 뒤에 have가 와야 할까, had가 와야 할까? 거기 뒤에 앉은 학생이 대답해보자.”
오. 교수님, 제발.
나는 대답하기 전부터 내가 망할 걸 알고 있었다.
“... have?"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시던 교수님은 곧 다시 수업을 진행하셨지만, 그 뒤로 다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으셨다. 내 영문과 수업은 내내 이런 식이었다. 쪽팔리고 주눅 들고 답답했다.
수업 점수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 싫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영어에 또 지는 거 아닌가. 평생 졌는데, 또 지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미 진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복수 전공 신청을 했고, 계절학기까지 꽉 채워 들으며 꾸역꾸역 학점을 채웠다. 하지만 그렇게 3년간 죽기 살기로 만들던 영문과 복수전공을 결국 마지막 학기에 내 손으로 포기하는 일이 생겼다. 대학원 입학을 위해 필요한 학점 조건 때문이었다. 성적이 낮은 과목을 지우면 대학원 입학 성적은 만들 수 있지만, 복수전공 필수 학점은 맞출 수 없었다. 복수전공을 취소하고 대학원에 입학할래, 복수전공을 지키고 대학원 입학을 포기할래. 결국 선택은 전자였다.
복수전공 취소 신청을 하던 날. 취소 신청이 완료됐다는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그동안 영문과 수업을 듣겠다고 끙끙거리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점수는 낮았지만 오히려 전공인 사회학보다 더 품을 들였었는데.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온 지난 시간을 ‘취소’하는 건 정말 쉬웠다. 그렇게 내 삶에 또 하나의 헛짓거리 이력이 생겼다. 속이 쓰렸지만 뭐 어쩌겠는가. 생각해봐야 속만 터지니 당장 할 일에나 집중하자. 나는 더 열심히 대학원 준비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원. 보상처럼 꽃길이 쫙 펼쳐졌다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긴장감에 팔이 저릿저릿했다. 특히 가장 신경 쓰였던 건 토론 수업이었다. 토론 중에 상대편의 말을 못 알아듣고 엉뚱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엉뚱한 소릴 했다는 건 상대편의 얼굴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지?’ 하던 얼굴이 ‘아, 얘 못 알아듣는군’ 하는 심드렁함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다. 그런 날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자괴감에 휩싸였다. 분명 캐나다에 있을 땐 모든 말이 잘 들렸던 것 같은데, 거기선 하는 발표마다 칭찬을 들었는데, 여기선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걸까. 터벅터벅, 발걸음이 무거웠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은 일도 수없이 많았다. 대학원 동기들과 지도 교수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공 수업 최종 발표를 한 일이 있었다. 점수에 꽤 큰 영향을 미치는 발표였기에, 한 달 내내 준비에 공을 들였다. 망하면 내 점수뿐만 아니라 같이 준비한 조원들에게도 불이익이 갈 수 있어서 준비하는 내내 불안에 떨었다. 발표 맡은 부분을 죽을 둥 살 둥 준비하고, 예상 질문을 여러 번 들여다봤다.
발표 당일, 다행히 발표는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질문 시간에 누군가가 나를 지목해 질문했다. 해당 현상을 왜 그렇게 해석했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답변이 끝나고 질문한 사람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마지못해 끄덕거렸고, 흘긋 본 지도 교수님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는 것. 그 장면만 기억난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아, 뭔가 잘못됐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교수님이 제발 내 점수만 깎고 동기들 점수는 건드리지 않게 해달라고 거의 매달리듯 기도했다.
잘리고, 속고, 떼이고_ 팍팍한 먹고사니즘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힘든 시간은 언제나 삶과 공존했다. 취직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나름 전략적으로 풀었다고 생각한 필기시험은 대차게 망했고, 어떤 곳에서는 몇 시간짜리 필기시험에 최종 면접까지 다 보고 돌아왔는데, 사실 내정자가 있었다는 소문을 뒤늦게 듣고 허탈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겨우 얻은 첫 직장도 결코 꽃길은 아니었다. 처음에 정규직이라 듣고 지원했는데 합격하고 나니 계약직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6개월짜리 계약서에. 6개월 뒤 새로 받은 계약서를 보니 나는 연구소에서 산단 소속으로 소속이 바뀌어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주변 동료들 말이 대학 연구소 일이 다 그렇고, 소속만 그렇지 일하는 건 똑같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계약서를 새로 쓴 지 4개월 뒤에 나는 내 상급자인 교수로부터 연구소 펀딩에 문제가 생겨서 내 고용이 불안정해졌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 내가 받은 선택지는 두 가지. 당장 아프리카로 파견을 가거나 연구소를 그만두거나. 지금 저를 권고사직하시는 거냐고 물어보니, 안 그러려고 이러는 거 아니냐는 짜증을 들었다. 그 교수는 입사 한 달도 안 됐던 나를 아프리카로 한 달 솔로 출장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한 달 출장을 무사히 마치고 연구 자료를 들고 귀국했을 때 내가 너무 기특해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일 것 같다고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집안 사정상 도저히 해외 파견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나는 입사 11개월 만에 연구소에서 나왔다. 당연히 퇴직금이고 뭐고 없었다. 11개월이고, 그것도 반씩 쪼개서 계약했으니까. 원래 연구소 계약이 그런 거라고 말하던 사람들은 다들 입을 싹 닦았다. 그렇게 내 첫 직장은 11개월 만에 사라졌다. 이런 게 어른의 삶이고 사회생활이라면 그건 참 어렵고, 억울하고 무서운 거구나. 마지막 퇴근 날, 송별회도 없었고 교수는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다.
새로 얻은 직장은 스타트업 NGO였다. 연구를 담당할 박사님들이 곧 이직하실 거니 그 아래에서 배우면서 연구 지원을 하기로 하고 입사했다. 당장 박사님들 오시기 전까지 몇 달 정도 일이 비니 홍보 업무를 맡아달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배운 적도 없고 해본 적도 없는 홍보를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났다. 온다던 박사님들은 감감무소식이었고, 나는 연구지원팀에 소속되어 홍보와 국내외사업을 다 섞은 괴상한 업무를 하고 있었다. 입사할 때 월급을 줄여 입사한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곧 올려주겠다고 말하던 대표님은 언제부턴가 ‘단체 사정이 어려운데도 너희 월급을 마련하기 위해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회의 때마다 하기 시작했고, 중간에 몇 번은 월급이 밀리기도 했다. 그리고 근무 조건은 점점 더 안 좋아져 갔다. 이 대표님은 내게 입사를 제안할 때, ‘인건비는 모두 준비되어 있고, 국제개발 직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고 싶어 회사를 열었다’고 했었다. 입사 때 내게 약속했던 월급 인상, 업무 내용, 휴가 일수 등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지만, 대표님은 결코 사과하지 않았다. 주인의식을 계속 강조했을 뿐이다. 아, 나 또 속은 건가. 퇴근하는 지하철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3년이 꽉 차 갈 때쯤, 출장지에서 하루를 묵었다. 숙소에 앉아 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회사 생활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출산 휴가를 간 직원은 둘인데, 대체 된 인력은 하나. 그리고 업무는 예전보다 훨씬 더 늘고 복잡해졌다. 업무가 몰리니 직원들 간에 갈등도 생겼다. 얼마 전에는 대표님이 아래 직원에게 내 흉을 보더라는 얘기도 들었다. 내가 사업을 따올 때는 자랑스레 상패를 회의실에 전시하고 여기저기 자랑하던 대표님이, 사업이 어려워지고 잘 진행이 안 되자 “남들이 안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더 버텨야 할까, 말아야 할까.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다.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다면 버티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이 회사에서 3년을 보냈는데, 그동안 내 업무 역량은 오히려 더 떨어진 것 같았다.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중요한 부분이 너무 많이 무뎌져 버린 것 같았고, 속이 답답했다. 나에게 함께 일해보자고 말하던 대표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단체의 업무와 성격은 점점 처음과 달라져 갔다.
그날 밤, 나는 숙소에 쪼그리고 앉아 몇 시간을 내리 울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회사를 나왔다.
퇴사 후 글쓰기 수업을 듣다가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게 됐다. 처음엔 ‘이렇게 또 길이 열리나 보다’ 하며 마음이 설렜지만, 결과적으로 자유기고가로서의 삶도 문제의 연속이었다. 계약서도 못 받고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마저도 원고료가 계속 밀렸다. 올해에만 아직 못 받은 원고료가 200만 원을 넘는다. 원고료 달라고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돼서, 난생처음 내용증명을 써보기도 했다.
또 원고료를 못 준다는 전화를 받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던 길. 나는 내가 또 넘어졌다는 걸 알았다. 왜 나는 매번 이렇게 어렵고 잘 못 할까.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대단해 보였다. 다들 멀쩡하고 무심해 보이는데, 저들의 삶에도 각자의 전장이 있을까? 문득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선 내 발이 보였다. 매 순간이 그렇게 서툴고 힘들었는데, 오늘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걸까. 실패가 너무 많아서 다 세기도 힘들었는데, 그 모든 실패를 겪어놓고 잘도 여기까지 왔네. 오늘의 이 답답함도 언젠가 지나갈까? 괜히 둥근 운동화 코를 까딱, 까딱거렸다.
헛짓거리는 없다는 믿음
이원지 작가의 책 <제 마음대로 살아보겠습니다>에는 이 작가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기가 나온다. 하지만 작가는 그 모든 낙담의 순간들이 결코 헛짓거리가 아니었다고 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조금이나마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은 헛짓거리라 생각하며 벌여온 일들이 (금전적 보상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꼭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놀랍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의 서유라 작가도 프리랜서 초창기의 수많은 시행착오가 대부분 자산이 되어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일이 예상과 달리 잘 풀리지 않아도 포기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지나치게 당황하거나 지레 포기할 필요 없다. 책임감과 인내심을 갖고 버틴다면, 시간은 그 모든 경험에서 의미를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두 프리랜서 선배들의 이야기는 내게 많은 위로가 됐다. 책장을 넘기다가 나도 모르게 펑펑 울기도 했다. 그 많은 실패 속에서 힘들었을 작가들의 모습이 괜히 내 모습과 겹쳐 보였고, 다시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모습이 멋져 보여서. 공감과 슬픔이 뒤섞인 이상한 울음을 울었다. 책이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어찌어찌 그 순간을 넘기고, 한숨 돌린 뒤에 다시 일어나면 신기하게 또 조금 앞으로 갈 수 있었다. 물론 다시 일어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회복 탄력성이 아주 좋은 분들은 훌훌 털고 곧 일어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생각보다 꽤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 넘어졌을 때는 아주 힘들었고, 숨이 넘어갈 듯 울었던 것 같다. 모든 게 무서워서 다시는 도전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한 번 겨우 일어나 보고, 또 울다가 일어나고 하다 보니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것도 같다. 이제는 예전의 몇몇 실패 정도는 대단치 않게 취급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게다가 부끄러운 시행착오 중 몇은 정말로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좋은 참고가 되기도 했고, 포기하고 싶을 때 한 번 더 앞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나를 도닥이고 격려하는 목소리가 되기도 했다.
지금 하는 일이 쓸데없다고 느껴질 수도, 스스로가 넘어졌다고 느낄 수도 있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도 들고, 실제로 지금 정말로 길을 잃고 넘어진 상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게 아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삶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삶의 변화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넘어지게 하거나, 혹은 심장이 닳을 것 같이 울게 하더라도, 사실 그곳은 우리의 끝이 아니고 삶도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곳을 끝이라고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