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는 어리석은 행동을 부르고, 이는 개고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매일 막차를 겨우 잡아타 퇴근하는 날이 계속되고, 일은 잘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서 누가 톡 치면 무언가 울컥 넘칠 것 같았던 어느 밤. 나는 머리인지 가슴인지 미쳐 날뛰는 뭔가를 감당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부다페스트행 비행기 표를 샀다.
좋은 조건의 표들은 이미 옛날 옛적에 다 팔렸고 남은 건 조건도 스케줄도 엉망인, 딱 봐도 이상한 표 몇 장. 취소도 환불도 안 된다. 그렇게 산 표는 인천에서 홍콩, 홍콩에서 아부다비, 아부다비에서 베를린, 베를린에서 부다페스트까지 무려 세 번을 경유해야 하는 막장 같은 비행 루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싸지도 않고 마일리지 적립도 거의 안 되는, 제정신이었다면 결코 사지 않을 표. 소위 말하는 ‘똥 표’였다. 이딴 표를 누가 사나 싶었는데. 세상에, 내가 샀다. 스트레스에 뇌가 절어서 반쯤 미쳐있던 게 분명하다.
모르는 나라, 처음 가보는 도시. 막상 혼자 가기는 싫어서 같이 가자고 동생을 졸랐다. 유럽 여행을 처음 가보는 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동행 표 한 장을 샀다. 잘 모르겠지만 뭔가 찝찝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음, 다시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다.
가는 길은 정말 험난했다. 인천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홍콩에 내려, 열 시간 정도 대기하다 아부다비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부다비에 내렸을 때는 인천공항 출발 후 20시간쯤 뒤였다. 아니다, 30시간 뒤였던가? 새벽 1시 캄캄한 공항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왜 이런 표를 사서 이 고생을 하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어 애써 딴생각을 했다.
아부다비 공항에서 3시간 반을 기다리다가 또 환승을 하기 위해 이동했다. 어딘가 다들 멍해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닭장 같은 버스를 타고 한 30분 정도 움직이니 우리가 타야 할 비행기가 보였다. 공항의 맨 구석, 일부러 최선을 다해 공항의 가장 끝에 가져다 놓은 것 같은 외진 곳에 비행기가 있었다. 외장에는 난생처음 보는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분명 내가 예약한 비행기와는 전혀 다른 마크로 보였다.
내부는 매우 낡았고 위생상태도 참혹했다.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려 했던 생각이 또다시 떠올랐다. 나는 왜 이딴 표를 산 것인가. 불쌍한 동생은 생전 처음 해보는 미친 비행에 정신도 체력도 다 놓고 끝내는 그냥 실려 다니듯 넋을 놓았다.
우리는 시체처럼 베를린에 내렸다. 당장 어딘가에 누워서 쉬고 싶었다. 마지막 비행기를 타기 전에 이용 가능한 라운지를 찾아서 온 공항을 다 헤맸다. 그러다 길을 잘못 들어 하마터면 환승하러 온 베를린에서 입국할 뻔했다. 금쪽같은 시간을 공항을 쏘다니는 데 다 쓰고 우리는 또 터덜터덜 비행기에 올랐다. 네 번째 똑같은 기내식이 나왔다.
고생 끝에 부다페스트에 내렸다. 오는 길이 엄청 힘들었지만 그래도 날씨도 좋고, 도착했다는 사실에 설렜는데. 망할, 짐이 안 나왔다. 내 것도, 동생 것도.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불안 불안하더라니. 그 미친 듯한 환승을 짐이 따라오지 못한 거다.
어디에 문의해야 하냐고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물어봤다. 다들 잘 알려주긴 하는데, 일부러 짠 건지 알려준 정보들이 다 잘못됐다. 다섯 명쯤 붙잡고 물어봤을까, 겨우겨우 찾아서 짐 분실을 신고했다.
우리는 여권과 지갑만 가지고 부다페스트에 뚝 떨어졌다. 당장 갈아입을 옷도 없고, 이 닦을 칫솔도 없다. 비누 한 장 없었다. 아니, 그냥 업무 스트레스로 멍청한 충동구매를 했을 뿐인데,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래도 핸드폰이 있으니 다행이라 위안하며 현지 유심카드를 사기 위해 가게에 들어갔다. 돈을 지불하고 유심 칩을 받았는데, 세상에. 이제는 핸드폰 잠금을 푸는 패턴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 이 여행은 망했어. 이쯤 되니 상황이 웃겨서 헛웃음이 났다.
호텔에 도착하고 체크인을 하고 나니 오후 2시 40분. 동네 마트는 3시면 닫는단다. 당장 필요한 물건을 사지 못하면 우린 양치질을 못하고 자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35시간이 넘어간 얼굴 화장을 50시간 가까이 씻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부다페스트는 생각보다 더웠고, 우린 여기저기 뛰어다닌다고 이미 땀에 절어 있었다. 이 옷을 그대로 입고 하루를 더 지내면 머리에서 버섯이 자랄 것 같았다.
마트로 내달렸다. 마감을 앞둔 직원의 눈총을 받으며 후다닥 이것저것 집어 들고 계산대를 향해 뛰었다. 마트를 나오자마자 철문이 드르륵 내려갔다. 3시 1분. 여기 마감 참 칼 같다. 그래도 칫솔과 세면용품, 물 두 병을 챙겼다. 다음부턴, 다른 건 몰라도 칫솔과 세면용품은 꼭 비행기 기내에 들고 타겠다고 다짐했다. 아, 다음부턴 그냥 이런 표를 안 살 거야.
첫날 일정? 그런 건 다 소용없었다. 이젠 갈아입을 옷을 사러 가야 했다. 관광지만 찾아 뒀는데, 옷은 어디서 사야 할지 모르겠다. 우린 옷 가게를 찾아 거리를 헤맸다. 겨우 갈아입을 옷 몇 벌을 골라 가게를 나왔을 때는 한 5일 정도 여행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이 너무 아팠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마흔 시간이 조금 넘었다. 부다페스트에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우리는 터덜터덜 다리를 건넜다. 이게 그 유명한 세체니 다리라는데, 아깐 정신없이 뛰어 건너느라 몰랐네. 다리 앞에서 문득 시선을 돌렸다. 눈앞에 노란 트램이 지나갔다. 트램 뒤편으로 높은 성이 보였다. 부다 왕궁이다. 노을과 밤하늘이 만나 분홍색인 듯 보라색인 듯한 하늘 아래, 조명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우리는 트램 길 가장자리에 그 풍경을 마주하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 풍경을 보고 있었을까. 하늘이 점점 진해지더니 어느 순간 짙은 남보라 빛이 됐다. 선선한 바람이 스쳐가고, 길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의 핸드 벨 연주가 들렸다. 짜르릉, 짜르릉.
온 도시가 반짝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따뜻했다. 그냥 그 풍경 하나로 모든 게 괜찮아졌다. 그 모든 힘들었던 순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풍경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아주 행복한 사람 같았다. 그래, 이걸로 충분히 괜찮은 것 같아. 끝도 없이 떨어져 내리거나 솟아 날뛰던 속이 어느새 잠잠했다.
또다시 트램이 한 대 지나갔다.
우리, 여행의 시작이 괜찮은 것 같지? 동생에게 물었다.
응, 이래서 여행을 하는 건가 봐.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더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