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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Aug 31. 2020

말라위가 너무 멀다

난이도 헬, 난생처음 아프리카 출장_02




표에 적인 일정 따윈 무시한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라탔고, 그 뒤로는 그저 정신없이 실려 다녔다. 중간에 몇 번 비행기가 어딘가에 들러 손님들을 추가로 더 태웠다. 비행기가 어딘가에 내리고 손님이 타고 내리는 게 반복됐다. 마치 버스 정류장에 서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비행기가 어디에 내렸는지도 잘 몰랐지만, 분명한 건 내가 가지고 있는 비행기 표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공항에 비행기가 내렸다 떴다는 거다. 최소한 아프리카 국가 5개 정도를 거쳐서 말라위에 들어간 것 같다. 어쩌면 5개 이상이었을지도.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서 말라위 릴롱웨까지 비행 시간 30분. 그 일정이 갑자기 24시간으로 늘어났을 때부터 헛웃음이 나왔는데, 실제로 몇 개 나란지도 모를 땅 위에 정신 놓고 떠 있으려니 이제는 그냥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마음 졸인다고 비행기가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이미 망한 일정이 다시 복구되는 것도 아니니, 이왕이면 좋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좋게 보면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고, 즐겁게 보내려면 얼마든지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기회에 모자란 잠을 좀 자자. 나는 아주 의자에 녹아내릴 듯이 잤다. 그렇게 자다 깼을 때 비행기 아래로 산맥이 보였다. 그때 기장님의 안내 방송이 시작됐다. 세상에, 저 산이 킬리만자로란다. 탄자니아에 와 놓고 그 유명한 킬리만자로를 못 본다는 게 아쉬웠는데 하늘에서나마 보니 아쉬움이 좀 가셨다.     


그 뒤로 환승 때문에 세 번 정도 공항에 내렸는데, 그 중 한 나라에서는 아예 입국을 해야 했다. 환승 시간이 너무 길어서 항공사에서 제공한 호텔에서 대기하다 와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긴 환승 시간이 전혀 예정에 없었다는 거다. 우선 내가 받은 표로는 그랬다.



환승을 기다리며



비행기 놓침을 당했다

나는 케냐 공항에 내려서 다음 환승 게이트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내 표에 맞는 비행기가 없었다.  이 직원, 저 직원을 붙잡고 비행기 표를 들이밀었다. 


“어디로 가야 해요?”  


대부분은 잘 대답해줬다. 


“이쪽으로 가세요.” 

“저리로 가세요.” 


문제는 그 대답이 다 틀렸다는 것. 수없이 ‘이쪽’과 ‘저쪽’을 돌아다녀도 내 환승 게이트는 당최 나타나질 않았다.      


그렇게 헤매다 도착한 한 카운터에는 딱 봐도 나처럼 게이트를 못 찾고 있는 여행객들이 모여 있었다. 다행히 잘 찾아왔나 보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내가 탈 비행기가 떠났단다


아니, 내가 타지 않은, 이륙 시간이 한참 남은 비행기가 왜 떠나요?      


항공사는 쿨하게 다음 비행기 표를 구해주겠다고 했고 대기 시간동안 케냐 시내에 있는 호텔에서 쉬고 오라고 했다. 알고 보니 카운터 앞에 모여 있던 길 잃은 표정의 여행객들도 나처럼 강제로 비행기 놓침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사람들 얼굴을 보니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들 넋이 나간 듯 보였다.     



항공사 직원이 쥐어준 종이를 들고 털레털레 입국 심사대를 찾았다. 


또다시 한 바탕 ‘이리 가라, 저리 가라’를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입국 비자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여권에 비자 스티커를 붙여주려던 심사관이 갑자기 돈을 내야 한단다.      


“입국비자 돈 내야해.” 


그럴 리가. 아까 항공사 직원이 분명히 비자 비는 무료랬다. 


“아니야, 나한테 설명해준 직원이 무료랬어.” 


그래도 입국 심사관이 물러서지 않는다. 


“걔가 잘못 안 거야, 돈 내야해” 


아니, 누가 항공사 과실로 호텔 제공받으면서 비자 비용을 내나요. 나는 다시 한 번 설명했다. 


“나는 케냐에 입국하려는 게 아니고 환승객이야. 항공사 과실로 환승하게 된 거고, 그마저도 환승이 갑자기 길어져서 호텔에 있다가 다시 오라는 거니까 입국 비자 비용을 안 내는 거야”      


몇 번의 “내야 돼” “아니야” 실랑이가 오가고 난 뒤에도, 내가 계속 “아니야”를 반복하니 입국 심사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럼 기다려” 하더니 다른 일을 보기 시작했을 뿐.


‘예, 예. 기다리는 거라면 제가 어제부터 지금까지 내내 하고 있는 중입죠.’ 


나는 그 직원 말대로 그냥 그 앞에서 마냥 기다렸다. 기다리라니 기다려야지 뭐 어쩌겠나. 그렇게 한참을 소위 ‘멍 때리며’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직원이 날 부른다. 그 사이에 항공사 측과 얘기가 된 건지 그냥 마음이 바뀐 건지 어쨌든 입국 비자를 찍어줬다. 더는 돈 얘기도 없었다.     






예정에 없던 곳, 노을을 선물 받았다


신기하게도 공항을 ‘이리로, 저리로’ 뱅글 뱅글 돌 때도, 입국 비자 비용이 왜 무료인지 이해 못 하던(또는 안 하던) 입국 심사관을 상대할 때도, 그 앞에서 기약 없이 내내 기다려도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애초에 일이 꼬이기 시작하던 탄자니아 공항에서부터 '될대로 되라'며, 벌어지는 일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로 결심한 게(또는 넋을 놓은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중요한 것들(출장비, 증빙, 연구 자료, 내 몸뚱이!)은 다 멀쩡했고, 이미 일어난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순간을 계속 스트레스 받으며 보내는 것 보다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훨씬 좋았다. 


여긴 내가 살던 나라에서 거의 24시간(?)을 날아가야 나오는 대륙이고, 문화도 인종도 역사도 경제도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내가 살던 세상의 상식을 따져서 뭐하는가. 위만 쓰리지.      


30분짜리 직항 표가 24시간짜리 4번 환승 표로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이미 웬만한 일들은 다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비자를 받았고, 고맙다고 말한 뒤 공항을 빠져나왔다. 마지막엔 입국심사관한테 싱긋 웃어도 줬다. 혼자 덜렁덜렁 출국 게이트를 나서는 나를 현지인들이 뚫어져라 쳐다보던 일도, 호텔로 간다던 버스가 1시간 가까이 출발을 안 하고 서있던 것도. 그 시간을 좋게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은 순간부터는 다 괜찮았다.      


그렇게 도착한 호텔에서 나는 정말 푹 쉬었다. 깨끗한 욕실에서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서울 사무실에 보다 제대로 소식을 전하고, 식사를 했다. 아프리카 음식은 왜 이렇게 맛있는지. 피곤해 죽겠는데도 밥이 계속 들어갔다.


겨우 접시를 물리고 방에 돌아오니 무섭게 피곤이 몰려왔다. 그대로 침대에 누웠는데, 음? 커튼 사이로 빛이 드는지 눈이 부셨다. 곧 잠들 것 같은데 일어나서 커튼을 치자니 너무 귀찮고,  그냥 참자니 눈이 부시다. 어떻게든 무시해보려고 끙끙대길 몇 분. 결국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투덜거리며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펄럭. 왜 침대에서 손이 안 닿게 만들어서는! 펄럭.  


순간, 얼굴 가득. 강한 주황빛이 덮쳐왔다. 


넓고 거친 땅 위로 진하고 강렬한 주황색이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강렬한 노을은 정말 처음 봤다. 몸을 아래로 끌어 당기는 피곤함과 온 시각을 가득 채우는 강렬한 자극 사이에서, 나는 사로잡힌 것같이 노을을 바라봤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광활한 평야 위로 저녁노을이 길게,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위에 키 작은 덤불 같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모여 있었다. 주홍빛이 이렇게나 강렬한데 나무 아래는 아주 어두웠다. 그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대비가 정말 아프리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강렬했고, 아주 밝았으며, 또 어두웠다. 


나는 사방이 온통 어두워질 때까지 그저 그 주황색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도 못했다.   


그 뒤 무사히 말라위로 넘어갔고 2주간의 출장도 잘 마쳤다. 말라위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여러 일이 많았지만 출장이 끝난 뒤에 머릿속에 계속 남는 장면은 그때의 그 노을이었다. 이상하게 정확한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붉고 어두었던, 강렬했던 그 대비가 잊히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길게 뻗어있던 주황색이, 얼굴 가득 쏟아지던 짙은 주황색이 계속 생각났다.     




갑작스러운 지연, 크게 달라진 비행기 표, 어그러진 출장 일정, 날 버리고 (그리고 다른 손님들도 많이 버리고) 혼자 훌쩍 떠났던 비행기. 갑자기 입국하게 됐던 케냐. 모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볼 수 있으리라 기대도 안 했던 킬리만자로도 결국 볼 수 있었고, 기억에 깊이 남을 만큼 강렬한 노을도 만났다. 또 일정이 어긋난 덕분에 비행기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었다. 아마 그 날 그렇게 잠을 보충하지 않았다면 뒤에 이어질 말라위 출장 강행군을 버티지 못했을 거다.     



여행에서는 돌발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익히 알던 상식과 다른 상황도 왕왕 벌어진다. 여행 자체가 일종의 ‘예측할 수 없음’ 패키지 같다. 


예측에서 어긋나는 순간, 분명 당황스럽겠지만 너무 겁먹지는 말자. 상황을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의외로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거다. 어쩌면 두고두고 꺼내 볼 멋진 추억이 막 만들어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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