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성이라는 함정
캐나다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 나는 한동안 현지인 집에 방을 얻어 생활하는 ‘홈스테이’를 했다. 워낙 겁이 많고 일신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라 홈스테이 가정을 아주 꼼꼼히 골랐다. 홈스테이 가정이 일종의 안전망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첫 번 째 홈스테이에서 몇 달을 지내고, 두 번째 홈스테이로 옮겼다. 새 홈스테이 집에는 말 상대가 될 만한 아이가 한 명 있었고, 피아노도 한 대 있었으며 멋진 개도 한 마리 있었다. 2층을 통째로 나 혼자 쓸 수 있다니 조건도 아주 좋았다. 좋은 집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살게 된 하숙집은 많이 실망스러웠다. 이 가정은 밤 늦게까지 자주 파티를 열었고 당연히 술에 취한 손님들 목소리로 시끄러웠다. 낯선 손님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개는 부엌에다 커다랗게 볼일을 봤고, 아이는 내 방에 함부로 들어왔다. 내가 사 놓은 김치를 주인아줌마가 다른 방 하숙생들에게 멋대로 꺼내 먹였고, 식사 때는 인스턴트나 냉동 음식 등 건강하지 않은 음식이 자주 나왔다. 집을 잘못 골랐다고 후회했지만 그래도 별수 없으니 그저 꾹 참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얼른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홈스테이에 남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하숙집에 살인미수 사건이 터졌다.
평소 집에 자주 드나들던 주인 내외의 지인이 늦은 밤 갑자기 찾아와 주인아저씨를 공격했다. 현관과 부엌 바닥은 피범벅이 됐다. 당시 집에 있던 주인집 가족과 하숙생들이 상황을 목격했고, 병원과 경찰서로 옮겨졌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일이 늦게 끝나 집에 늦게 도착한 나만 그 횡액을 피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방에 살던 두 하숙생은 바로 짐을 싸서 하숙집을 나갔다. 남은 하숙생은 나 하나. 나는 그때도 나가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여전히 홈스테이라는 형태를 떠날 용기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하숙생들이 다 떠나는데 나까지 나가겠다고 말하는 게 미안했다. 주인집에게는 학생을 받는 게 일종의 수입이었고, 이미 학생 둘이 나갔는데 나까지 나가면 안 그래도 큰일을 당한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큰일을 당해서 정신없으니 학생들이 나가는 게 오히려 반가웠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다.
상황은 거기서 더 나빠졌다. 1층 부엌에 연결된 정원 출입문을 늘 열어 두는데, 부엌의 음식 냄새와 바로 치우지 않고 한참을 방치한 개의 배설물 냄새가 섞여 위생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러니 정원에서 집으로 쥐가 들어온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쥐는 곧 2층까지 올라왔다. 방에 쥐가 있는 게 분명한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는 점점 커졌고, 여기저기서 들렸다. 쥐가 늘어나고 있었다.
불을 끄고 누우면 갉작갉작 무언가 갉는 소리가 들렸다. 자다가 소스라쳐 깨고, 아침에 일어나보면 쥐의 흔적을 발견하는 날이 계속됐다. 그 지경이 됐는데도 나는 버텼다. 알량한 동정심과 막연한 두려움이 발목을 꾹 잡고 놔주질 않았다. 집주인에게 쥐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냥 하루하루를 견뎠다. 외국인 학생인 나에게는 홈스테이가 가장 안정적인 주거 형태라고 믿었기에 어떻게든 그곳에 남아있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계속된 스트레스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좋은 뜻에 남기로 했던 마음은 다 사라지고, 날카롭고 피곤한 사람만이 남았다.
그때부터는 집착 또는 오기로 버텼다. 나가면 안 되는 온갖 이유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는 사람 없는 땅에서 혼자 나가 방을 알아보는 것도 불안했고, 금전적인 부분도 걱정이었다.
‘계약을 잘못해서 비싼 렌트비를 내면 어쩌나’, ‘하숙하면 식사를 제공하는데 혼자 살게 되면 식비도 많이 나갈지 모른다’, ‘나는 생활 물가를 잘 모르지 않나’, ‘이상한 룸메이트를 만나면 정말 힘들 텐데’, ‘집 계약에 묶여서 옴짝달싹 못 하면 어쩌지’.
온갖 이유가 떠올라 마음을 괴롭히더니 결국 ‘역시 그냥 여기 남아있는 게 좋겠다’는 항복 선언을 듣고서야 체념같이 가라앉았다. 내 속에서는 이런 격렬하고 소모적인 갈등이 매일 반복됐다.
시간이 지나도 쥐는 사라지지 않았다. 삶은 엉망이 되어갔다. 잠들기 전에는 온 방 안을 두리번거렸고, 불안에 떨다 겨우 잠들었다. 어느 날은, 자기 전에 분명히 닫아 놓았던 책상 서랍 안에서 쥐가 갉아 먹은 물건을 발견하고 펑펑 울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끔찍했다. 그렇게 몇 주를 보냈다. 나는 더 예민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다 깨서 책상 위의 쥐와 눈이 마주쳤던 밤.
나는 내가 더는 견딜 수 없다는 걸 겨우 인정했다. 그 정도까지 가서야 깨달았다. 이 집을 나가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것이 결코 옳지 못하다는 것을. 이것은 ‘안정’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이렇게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견디도록 강요하는 게 내게 아주 못 할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든 상황이 나에게 그 집에서 나오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미련하게 안정성이라는 환상을 붙잡고 계속 고통을 견디고만 있었다.
정신을 차린 뒤 나는 바로 룸메이트를 구했다. 급하게 구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정말 바로 찾았을 수 있었다. 여자, 한국인, 어학연수생. 이게 내가 당시 함께 살게 된 룸메이트 후보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신중하게 홈스테이 자료를 보고 조건을 따졌던 과거와 대조적으로, 이번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신기할 만큼 바로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같이 집을 보러 가기로 약속을 잡았고, 집 보러 간 첫날 바로 렌트 계약을 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제임스베이 지역이었다. 이곳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부유한 백인 은퇴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과 그래서 ‘집값이 비싸다’는 소문뿐이었다. 집은 제임스베이 한가운데 있었다. 주변은 깨끗하고 조용했으며 아파트는 넓고 쾌적했다. 동네 좋고, 집 좋고, 무엇보다 가격이 비싸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이사를 결정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부동산 계약은 모든 게 정말 신기할 만큼 빨리, 그리고 척척 진행됐다.
그렇게 새로운 집에서 낯선 룸메이트와 함께하는 삶이 시작됐다. 새로운 집은 정말 완벽했다. 집값이 비싸지도 않았고 동네는 안전했다. 아침, 저녁으로 길에서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사랑에 빠질 만큼 아름다운 공원과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동네를 벗어나 조금만 걸으면 곧 상점가와 이너하버, 국회의사당 등 유명한 관광지에 닿을 수 있었다. 아파트 관리인 부부는 정중하고 친절했으며, 동네에 사는 동안 주변 이웃으로부터 단 한 번도 인종차별적인 일을 겪지 않았다.
룸메이트 민아씨는 정말 최고였다. 유쾌하고 상냥했으며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한 좋은 사람이었다. 민아씨 덕분에 캐나다에서의 기억이 더 행복해졌다. 홈스테이를 나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거다. 이사하길 잘했다고 다시 한 번 느꼈다.
몇 번이나 나를 주저앉히던 걱정들은 다 쓸데없었다.
생활용품은 중고로 얼마든지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고, 식자재를 사서 음식을 해 먹으니 식비도 줄고 더 건강하게 먹을 수 있었다. 동료와 친구들을 초대해서 한국 음식으로 파티를 하고, 친구들과 성탄절을 축하하고, 서로의 생일파티를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가 홈스테이를 떠나 새로운 공간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덕분에 외국 친구들을 초대하려면 음식 말고 놀거리도 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친구 한 명을 초대하면, 그 친구의 친구가 다섯 명쯤 같이 온다는 것도 알았으며, 지인들과 함께하는 소박하고 즐거운 파티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도 알게 됐다. 자연히 대화할 기회가 늘어나서 영어도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안정성만을 위해 홈스테이에서 계속 버텼다면 외국에서의 임대차 계약에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고, 지인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나누거나 멋진 생일 파티를 여는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거다.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삶을 잘 꾸려갈 수 있었다. 그걸 전혀 모르고 억지로 불편한 매일을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집에서 행복하다고 느낄 때마다, 홈스테이 집을 나오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 결정하기 전에 모든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안정을 보물처럼 여긴 나머지 그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끌어안느라 뭔가를 더 잡을 여력이 없다. 나도 원래의 자리를 답답해하면서도,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며 버텼다. 하지만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정말 안정적인 걸까. 혹시 그 ‘안정’이 또 다른 가능성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넘어가기 두려운 그 선 밖에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성장, 발견, 또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안타깝게도 ‘가능성’ 자체는 어떠한 성공도 담보하지 못한다. 시도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그냥 가능성으로 끝난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움직여야 한다. 우리의 잠재력이나 아이디어, 꾸준함, 그리고 사랑받은 기억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다.
성경의 비유 중에 달란트 이야기가 있다.
먼 길을 떠나게 된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각각 10달란트, 5달란트, 그리고 1달란트를 맡겼다. 10달란트와 5달란트를 받은 종은 이를 활용하여 돈을 불리려 하지만, 1달란트를 받은 종은 이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땅에 묻어 둔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10달란트와 5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은 원래 받았던 돈과 불린 돈을 가지고 나와 칭찬을 듣지만, 1달란트를 땅에 묻었던 종은 크게 혼이 난다. 어릴 때는 이 비유를 보며 주인이 조금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돈을 잃어버릴까 두려웠을 종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김희경 작가의 책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에서 우연히 이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됐다. 저자는 달란트의 비유가 우리 인생을 말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이야기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종은 단순히 1달란트를 묻은 게 아니다. 어쩌면 그건 그에게 주어진 가능성, 즉 그의 삶이 아니었을까. 종은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안정성을 찾았다. 그리고 이때 수많은 가능성도 같이 묻혔다. 실패가 두려워, 본인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그저 묻어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그에게 삶을 주었던 하나님이 그렇게 화를 내셨나보다.
우리도 종종 이런 잘못을 저지른다. 실패가 두렵고, 잃을 것이 두려워서 무언가를 시도하기가 참 어렵다. 섣부른 시도 끝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도 잃을까 두려워한다. 물론 이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하지만 5달란트, 10달란트를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두렵지 않았을까. 재능이 많으면 실패가 덜 두려울까? 그렇지 않다. 모두 비슷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함과 편안함 밖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을 때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성과를 이룬다.
안정성은 분명 좋은 가치다. 하지만 너무 얽매이면 이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이 두렵게 느껴진다. 새로운 시도, 실수, 실패, 사람들의 평가, 성공하지 못했을 때 내가 감수해야 할 유무형의 대가들. 무언가 일상과 달라질 때면 이런 두려움이 마음속에 가득 피어올라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지금의 상황을 지키고 싶어진다. 그렇게 삶을 지금 모습 그대로 박제하려 한다. 하지만 안정성을 지키려다 자신의 삶, 가능성, 미래를 땅속에 파묻어 버리는 것은 너무 큰 손해다. 안정성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할 수 있고, 결국 그 선택이 장기적으로 우리의 자리를, 꿈을, 자아를 위협할 수 있다. 그렇게 좋아 보이던 안정성이 오히려 위험이 되는 것이다.
지금 앉아있는 곳에서 일어나자. 그리고 우리의 ‘안전한 동그라미’에서 한 발짝만 더 걸어가 보자. 내 딛는 걸음 끝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생생한 삶, 찬란한 성장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선을 넘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