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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Jan 07. 2021

우리의 최선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선택지가 된다면

미술 봉사단을 만들었다_1


이게 최선입니까확실해요?


국제개발협력 NGO에서 일할 때 ‘베트남 미술 봉사여행’을 기획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베트남 지원 사업을 맡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노숙하다 구조되거나 가난 때문에 가정의 돌봄을 받기 어려운 아이들을 보호하는 ‘소녀 보호 시설’에 비용을 지원하고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업무가 있었다. 그때 나는 단순히 지원금을 보내는 기존의 지원 방식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이들을 안전한 곳에서 보살피며 먹이고 입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무언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아이들은 가난해서 시설에 들어왔다. 가난 때문에 집을 나오고, 버려지고, 길을 헤매다가 구조되어 시설에 들어왔다. 그런 아이들이 언젠가 사회에 나갔을 때, 다시 가난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거리를 헤매지 않게 하려면 대체 뭘 해야 할까.      


아이들의 인생은 계속되는데, 우리의 지원은 어쩔 수 없이 현재에 머물러 있다. 아이들은 결국 큰다. 언젠가는 시설 밖으로 나가서 스스로 생존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부단히 준비한 사람에게도 사회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과연 우리의 노력이 이 아이들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도록, 사회에 나가서 너무 불공정하지 않게, 게임이라도 해볼 수 있게끔 도와줄 수 있는 걸까.      


아이들이 언젠가 시설에서 나가야 할 때, 조금 더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기를 바랐다. 혹은 언젠가 반드시 마주하게 될 힘든 시간에 좀 더 튼튼하게 버틸 마음의 힘을 가지길 바랐다. 물론 일개 지원 단체 직원이었던 내가 달리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하는 지원 말고 뭔가 더 필요한 것 같고, 더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새로운 가능성

<소사이어티6>나 네이버 <그라폴리오> 같은, 작가들이 온라인을 통해 본인의 작품을 소개하고 이를 상품으로도 판매할 수 있게 하는 사이트들이 생각난 건 여느 날 같이 이런 생각 속에 실려 가던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였다.      


미술과 온라인. 시설의 아이들은 종종 후원자들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시설 선생님들을 통해 전달받은 사진 속에는 아이들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다. 그림 그리기는 아이들에게 친밀한 활동이었다. 십대들은 SNS 활용에도 익숙했다. 만약 아이들이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생각할 수 있게 되면, 그중 한 명이라도 언젠가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장사 밑천을 쥐여 줄 수는 없지만, 시설에도 인터넷은 깔려 있으니 온라인에서 활동할 수 있게 문을 열어주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혹시 계획대로 잘 안 돼서 그냥 어딘가에 그림만 덜렁 올려놓게 되더라도, 그걸 본 해외 후원자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날부터 인터넷과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미술을 국제개발에 적용한 사례가 있을까, 개발도상국에서 시도했던 여러 교육 프로그램 중에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미술 교육이 있었을까. 나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었고, 아동, 청소년 교육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참고할 만한 사례가 절실했다. 디지털 드로잉을 활용한 사례는 찾을 수 없었지만, 다행히 미술을 국제개발 프로그램에 적용한 논문은 하나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찾은 몇 없는 시도들은 대부분 미술의 정서적 기능에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정서적인 기능도 정말 중요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조금 더 현실적인 부분이었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교육은 제공하지만, 의무교육이 끝난 뒤에는 사실상 더 교육을 시키기가 어렵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가족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시설 출신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니 더더욱, ‘이게, 아이들이 언젠가 자라서 먹고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같은 좀 더 현실적인 내용이 궁금했다. 안타깝게도 내 서치가 부족했었는지 이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계속 가고 싶다면 내가 직접 사례를 쌓아야 했다.     


고민이 계속됐다. 만약 이 아이디어를 정말 지원사업으로 연결한다고 해도 과연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시설에는 디지털 드로잉 기계가 없었다. 장치를 마련한다고 해도 교육은 누가 맡나. 또한 미취학, 저학년 아이들은 아직 디지털 드로잉 장치를 이해하고 활용하기 어려웠다. 사업비를 마련하려면 어딘가에서 공모 사업을 받아와야 하는데, 심사위원들에게 이런 사업 모델이 어떻게 구체화 될 수 있고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설명할 방법이 많지 않았다.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 문제들이 너무 많았다. 모든 게 너무 생소했다.    


 


미술 봉사단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일은 끊임없이 몰아닥쳤고, 업무를 쳐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심증만 있고 확신은 없던’ 이 고민거리는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내 모습이 내게 경각심을 갖게 했다.  

   

국제개발 일을 했던 건 몇 년 안 되지만, 일을 시작한 뒤 매번 가슴 아팠던 건 열심히 배우고 공부한 것과 현장이 너무 다르게 흘러간다는 거였다. 물론 교실과 현장은 다른 법이지만, ‘이래선 안 된다’고 배운 것들이 현장에서 버젓이 펼쳐지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 슬펐던 건, 분명 나와 같은 교육을 받았을 선배들이 어느새 그 현장에 깊이 동화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나도 그런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선배들처럼 고민을 멈추고, 현장의 논리에 적응해서 기존 방식을 그저 답습하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런 두려움이 내 등을 떠밀었다. 이 고민을 그냥 묻어두지 말라고. 결국 그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확신은 없었지만, 우선 시도해보기로 했다. 바빠서, 혹은 그냥 ‘에이, 아닐 거 같아’하고 넘겨버린 생각이 혹시 아이들에게는 귀중한 선택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무시해버릴 수가 없었다.    

 

상사에게 베트남에 갈 일회성 미술 봉사단을 만들겠다고 기안을 올렸다. 디지털 드로잉 장비를 가져가서 고학년 학생들에게는 디지털 드로잉을 가르치고, 저학년 아이들과는 미술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해보겠다고. 그렇게 다녀온 결과가 괜찮다면 그를 바탕으로 내년도 공모 사업에 해당 내용으로 지원해보겠다고.

 

감사하게도 상사와 회사는 내 기획안을 받아들여 줬다. 회사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예산은 한 푼도 없었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일손 부족한 스타트업 NGO에서 실무 직원 하나를 일주일 가까이 업무에서 빼주고, 해당 프로젝트를 단체의 이름으로 진행할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그렇게, 미술 전공자도 교육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이끄는 ‘미술 봉사단’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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