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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Nov 28. 2020

환경을 뛰어넘는 사람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간혹 ‘이 사람 참 멋있다.’고 절로 감탄이 나오는 사람들을 만난다. 왜 그 사람들이 특별했을까 생각해보면, 다들 크건 작건 본인이 처해있는 환경, 조건, 처지를 넘어서 계속 노력하고 발전하며, 결국 목표를 성취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O 이야기]


O는 국제개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관련 정보를 얻고, 자신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자 지진 복구와 구호 작업이 진행되던 아이티로 파견 봉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아이티에서의 1년 뒤 O는 국제개발 분야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지원해 런던으로 향했다.

     

대학원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얻은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런던의 생활비는 너무 높았다. O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수업이 없을 때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독서실에서 책과 씨름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식당으로 뛰어가고, 일이 끝나면 다시 과제를 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영국에서 학생이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주 20시간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식당 아르바이트 스무 시간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세 명이 방 하나를 쓰는 룸쉐어에 들어갔다. 불편하고 좁았지만 방에서는 가능한 잠만 자고 낮에는 학교나 아르바이트하는 식당, 도서관과 카페에서 주로 보냈기에 견딜 만했다. 석사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생활비를 벌고 아끼며 공부를 병행해나갔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큰 상이 있었다는 동화처럼 O도 멋진 결과를 손에 쥐었으면 좋았으련만, 삶은 언제나 동화보다 험난하다. 그렇게 힘들게 아르바이트하며 수업을 들었지만, O는 첫해에 졸업하는 데 실패한다. 다음 해에 있을 재시험을 기다리며 한 해 동안 공부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O는 가만히 시험만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곧 베트남으로 파견을 떠났다.      


파견지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다시 본 시험. 이번에도 불합격이었다. 주변에서는 우려와 조롱이 이어졌다. ‘그러게, 공부만 해도 졸업이 힘든데 아르바이트 같은 걸 한다고 시간을 낭비한 탓이다’, ‘한 번 졸업에 실패했으면 졸업 공부에만 집중했어야지 괜히 파견 같은 걸 가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 ‘이번에는 그냥 일 그만두고 공부에만 집중해야 하지 않겠냐’ 등등 온갖 말들이 그녀를 흔들었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O의 졸업에 회의적이었다.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O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파견지를 떠나지도 않았고 졸업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불평불만으로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우선 학교에 다시 기회를 요청했다. 다행히 학교는 O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O는 평소처럼 일상을 살았다. 여유롭게 공부할 수 없는 환경에 화내며 절망하지도 않았고, 졸업에만 목을 매며 주어진 일을 내팽개치지 않았다. 평일에는 일을 했고, 때로는 회식도 하고 출장도 갔다. 골치 아프고 힘든 일은 평소처럼 늘 이어졌다. 그래도 공부를 계속해나갔다. 그렇게 평범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삶을 살았다. 다시 일 년 뒤. O는 결국 졸업 요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그리고 2년간의 해외 파견도 잘 마무리 지었다. 남들보다 2년 늦었지만, O의 졸업은 아주 값지고 의미 있었다. O는 자신의 상황을 다시 한번 이겨냈다. 


현재 O는 국제개발협력 NGO에 입사해서 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실무자로 활약하며 종횡무진하고 있다. 



     


[J 이야기]


과거의 실패나 불행한 경험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늘 긍정하고 꿈꾸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바로 캐나다에서 만난 J다. 그녀는 늘 성실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항상 단정했으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실패라곤 해 본적 없을 것 같은 당당함과 밝음이 태도에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다른 사람과 다를 것 없이 여러 실패와 좌절을 겪었다. 학창 시절 J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었다.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중국어를 배우고, 수영을 배우고, 체력을 기르며 여러 번 항공사에 지원을 하는 등 몇 년을 노력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같이 준비하던 친구들이 다 합격하는 동안 자신만 남아 몇 번을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목소리가 담담했다.      


외모 콤플렉스도 있었다. 아래턱이 조금 앞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고 느꼈다. 이 턱 때문에 스튜어디스 입사에 계속 탈락하는 걸까 고민스러웠다. (나는 아무리 봐도 알 수 없었다. 저 매끈한 턱 어디가 튀어나왔다는 건가?) 겨우 마음을 잡고 취직한 회사에서도 매우, 정말 매우 부당한 일을 겪고 그만두게 됐다. 이런 얘길 들었을 때 속으로 많이 놀랐다. 항상 밝고 뭐든 척척 잘 해내는 모습 어디에서도 그런 어려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튜어디스의 꿈이 좌절되고, 겨우 입사했던 회사도 좋지 않게 떠나게 됐지만 J는 주저앉지 않았다. 곧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경제와 경영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회계사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 뒤 J가 경영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학위 과정을 밟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과 공부, 결혼 생활을 병행하면서도 그녀는 늘 씩씩하고 밝았다. J는 결국 캐나다 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H 이야기]


캐나다에서 인턴십을 하던 중 새로운 인턴이 한 명 들어왔다. 영국에서 왔다는 H였다. 처음 봤을 때 꽤 놀랐던 것 같다. 인턴이라고 해서 나랑 비슷한 나이대일 거로 생각했는데, 웬 중년 여성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H는 쉽게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이렇게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재밌게 놀 수 있구나. 작았던 내 세계는 그녀와 어울리며 또 한 뼘 넓어졌다.      


H를 다시 만난 건 런던에서였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수다를 떨다가 H가 새로 정착했다는 작은 마을에 대해 듣게 됐다. 런던 근교 작은 시골 마을이었는데 알고 보니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왜 그런 곳에 정착했냐고 묻자 그녀가 쑥스러운 얼굴로 휴대폰의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리듬체조 선수들의 동작을 점토로 빚은 인체 조소였다. 체조 선수들이 움직일 때 그 역동적인 모습이 아름다워서 이를 빚기 시작했다고 했다. 

     

사실 처음에 사진을 봤을 때는 조금 황당했다. 사진 속 작품들에서 딱히 전문성이나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너무 평범했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미술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만든 작품 같았다. 마른 지점토 위에 얼기설기 칠해놓은 물감 때문에 더 어설퍼 보였다. 말 그대로 그냥 취미 수준인 것 같은데 이런 걸 만든다고 굳이 예술가 마을에 정착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기대하는 표정에 어쩔 수없이 어색하게 칭찬을 건넸지만, 마음속으론 그녀가 곧 이를 그만둘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관련 교육을 받지 않았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건 그녀에게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계속했다. 꾸준히 체조 선수들의 영상을 보고, 상을 빚었다. 매번 비슷한 동작만 빚던 처음과 달리 점점 다양한 포즈의 상이 완성되어 갔다. 완성품에 색을 칠하는 실력도 늘었다.  

   

내가 막 런던에 도착했을 때 H가 보여줄 수 있었던 건, 화소도 안 좋은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어설픈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내가 학위를 마치고 런던을 떠날 때는 달랐다. 그녀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포트폴리오를 모으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그녀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 예술가 커뮤니티 내에서도 조금씩 활동 반경을 넓혔다. 홈페이지에는 많은 작품 사진과 소개 글이 실렸고, 마을의 작은 전시회에 출품도 했다. 남들이라면 은퇴를 바라볼 나이, 미술과 전혀 상관없던 경력도 예술가가 되겠다는 H의 목표를 꺾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어엿한 예술가였다.  




언제나 최고의 환경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많이 실패하기도 하고, 무서워서 아예 시도도 못 할 때도 많다. 주변에서 썩 긍정적이지 않은 피드백을 줄 때면 더 기운이 빠진다. 다들 그렇게 주저앉는다. 그런데 실패를 해도, 상황이 어려워도, 당장 가지고 있는 것이 부족해도,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것 같아도, 추구하는 바를 계속 좇는 사람들이 있다. O와 J, H도 그랬다. 환경, 조건, 처지처럼 사람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조건들 앞에서도 주저앉지 않았다.     


“돈이 없으니 유학을 못 할 거다”

“두 번이나 떨어졌으니 졸업이 되겠냐.” 

“원하던 직장도 못 얻고 어렵게 들어간 직장도 그만둬 놓고 갑자기 무슨 회계사냐.”

“그 나이에 갑자기 무슨 미술이냐,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했지 않느냐.”      


의심과 조롱, 실패할 거라는 말이 O와 J와 H의 도전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환경을 이기는 사람들은 그런 목소리 속에서도 하기로 한 것을 계속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냐며 미리 예단하지 않았고, 과거의 실패나 현재의 조건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시도도 안 해 보고 접어버리는 괜한 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종종 환경과 처지가 아주 강력해 보이지만, 그게 언제나 절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오늘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넘어 목표, 가치, 소망을 위해 걷는다. 모두 크건 작건 조금씩 자신의 상황을 이겨내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뜨거워진다. 냉소적으로 말라비틀어진 마음에 다시 열심히, 그리고 충실히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 어제의 환경에 사로잡히지 말고, 내일의 걱정에 미리 절망하지 말고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일. O와 J, H를 떠올릴 때마다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어느 날, 나처럼 마음이 말라버린 사람을 만나게 됐을 때 작게나마 격려가 되는 삶이 되길. 그렇게 될 수 있길 바라며 오늘의 삶을 다시 고쳐 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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