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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Jan 16. 2021

당신이 안다고 믿는 것, 정말일까?

관람객이 갑자기 쓰러졌다.

  

빅토리아의 여름. 또 다른 크루즈가 빅토리아에 정박했다. 미국에서 온 단체 손님이 성으로 잔뜩 몰려들었다. 크루즈 관광객들은 전반적으로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얼핏 보기에도 팔순은 훌쩍 넘기셨을 것처럼 보이는 분들 오실 때도 있다.      


그날도 그랬다. 관광객 무리 중 한 눈에 봐도 연세가 좀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거동이 느리고 몸이 조금 불편하신 듯 보여서 나도 모르게 계속 시선이 따랐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별일 없이 무리에 섞여 관람 코스를 따라 성안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기프트샵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성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팬트리와 브랙퍼스트룸 사이의 복도에서였다. 관람코스의 마지막 부분으로, 기프트샵 입구와 바로 이어져 있다. 문 너머로 들여다보니, 세상에! 아까 그 할아버지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가까이 가 보니 할아버지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누워있었고, 그 옆에서 한 중년 여성이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스태프임을 알아보고 바로 할아버지의 상태를 알려줬다.

     

“호흡이 없어요. 앰뷸런스를 불러야 해요.”     


....네??     


호흡이 없다니!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급히 허리춤의 무전기를 뽑아 들었다.


“여기, 할아버지 한 분이 쓰려지셨는데 호흡이 없어요! 1층 팬트리 앞이에요!”

     

무전을 하는 사이 그 여성분이 할아버지의 가슴을 반복적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응급조치인 심폐소생술이었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작은 공간이 모인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무전을 듣고 근처에 있던 큐레이터와 직원이 급히 뛰어 내려왔다. 한 명이 911에 신고 전화를 했고, 한 명이 쓰러진 할아버지 옆에 남았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다시 기프트 샵으로 돌아갔다. 가게를 비워 둘 수는 없어서 돌아가긴 했지만, 계속 출구로 시선이 갔다. 돌아가신 거면 어쩌지? 호흡이 없다고 했는데. 정말 돌아가신 걸까?


초조하게 서성거리길 몇 분쯤, 곧 기프트샵에 난 뒷문으로 구급대원들이 뛰어 들어왔다. 들것을 든 대원 여럿이 급히 안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저 들것에 흰 천이 씌워져서 나올까 봐 너무 무서웠다.     




그런데 얼마 뒤, 구급대원들과 함께 아까 그 할아버지가 걸어 나오시는 게 아닌가?! 부축을 받고 있었지만 분명 스스로 걷고 계셨다. 성에서 나와 기프트샵을 통과해서 뒷문으로 나가시기까지.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어떻게? 분명히 호흡이 멎었던 분인데?


쓰러져 호흡이 멎었던 고령의 관광객이 다시 숨을 쉬고, 정신을 차려 자기 발로 성을 걸어 나간 일.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바로 빠르고 정확한 응급조치 덕분이었다. 알고 보니 아까 할아버지의 상태를 살피고 심폐소생술을 하던 여성이 간호사였다고 한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쓰러질 때 마침 바로 옆에서 관람 중이었다. 덕분에 갑자기 심정지가 왔음에도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바로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위급한 순간을 넘겼다.


이쯤 되니 할아버지가 운이 없는 건지 좋은 건지 헷갈렸다. 외국에 여행 와서 심정지가 왔던 건 매우 불운한 일이지만, 마침 딱 그 장소 그 시간에 적절한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있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게 얼마나 희귀한 확률일지 계산도 잘 안 된다.  

   

할아버지는 자기 발로 걸어서 무사히 구급차에 올랐다. 구급대원들과 할아버지가 떠난 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성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방금 내가 놓친 것이 두 가지나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방금 나는 응급상황 대응 매뉴얼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직원이 되고 무전기를 받을 때 무전기 사용에 대한 매뉴얼도 받아 읽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무전기에 대고 상황을 직접 언급하지 말라고 나온다. 무전기를 들고 있는 직원들은 성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어서, 직원 근처를 지나는 관람객들이 무전 내용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칫 손님들을 놀라게 해서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상황을 직접 언급하지 말고, ‘니콜. 잠시 1층 팬트리 앞으로 와줘요. 급해요.’처럼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을 호출만 하라고 했다. 나는 그걸 완전히 까먹었고 말이다.      


둘. 나는 심폐소생술도, 매뉴얼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몰랐다. 정확히는 알기만 했고 제대로 적용할 줄 몰랐다. 사태가 다 진정되고 나서야 그런 게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뉴얼을 여러 번 읽으면서 그런 상황이 오면 꼭 무전 사용에 주의해야겠다고 다짐도 했었는데, 막상 정말 일이 터지니 당황해서 무전에 온갖 것을 다 외쳐버렸다. 매뉴얼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매뉴얼을 아무리 읽어도 급할 땐 결국 몸에 밴 대로 행동하더라.   


무전기 사용법뿐만이 아니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응급조치법을 배웠었다. 실제로 사용해보지는 않았지만, 응급 상황이 되면 잘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응급조치가 가장 필요할 때는 이런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만약 그 자리에 마침 간호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응급조치를 취했을까? 마음속에서 ‘아니’라는 답이 들렸다. 혹시나 생각이 났더라도 아마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배웠고, 그마저도 배운 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 사고 없이 할아버지가 무사히 성을 나가신 건 할아버지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다행이었다. 만약 일이 잘 못 됐다면, 그 순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아주 힘들었을 거다.     




우린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당장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랬다.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이 달랐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거나 피아노를 치는 방법을 안다. 자전거는 균형을 잡으며 페달을 적당한 속도로 밟으면 되고, 피아노는 악보대로 박자에 맞춰 건반을 누르면 된다. 하지만 이를 안다고 해도 모두 한 번에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자전거도, 피아노도 모두 몸이 그 방법과 감각을 익히기까지 오랜 연습이 필요하다.     


삶의 여러 부분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 제대로 알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실전이 필요하다. 그래야 온전히 내 것이 된다. 그런데 익숙한 삶의 터전에서 비슷한 일상을 살다 보면 우리가 뭘 모르는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지 잘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일, 그래서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배웠던 행동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미안하다고 말하기, 고마움을 표현하기, 용서하기, 누군가를 사랑하고 표현하기,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기, 무언가를 즐기고 좋아하기 등만 해도 그렇다. 잘못했을 때 사과해야 한다는 건 어린아이도 알지만, 정말로 사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말이다. 여러 번 해봐서 익숙하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해야 할 때 즉각 행동으로 옮기기가 힘들다.


때론 ‘아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이를 뭐라 불러야 할까 고민하다가 ‘체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체득은 “직접 체험하여 알게 됨” 또는 “몸소(직접 제 몸으로) 체험하여 알게 됨”이라는 뜻을 가진다. 우리에게는 이 체득이 필요하다. ‘직접’, ‘몸소’ 시행하고 체험해서 익히는 것 말이다.

     

당신이 체득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지금 떠오르는 그것을 기억해두고 용기를 내어 시도해보자. 결국 몸으로 체험한 것만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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