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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Jan 21. 2021

쇼핑보다 여행

저는 쇼핑보다 여행이 더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기꺼이 돈과 시간을 사용하고, 누군가는 남을 돕는 일에 돈과 시간을 쓰며 기쁨을 느낀다. 내한한 외국 유명 가수의 무대나 뮤지컬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사람이 있는 반면, 훌륭한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은 의상과 가방이야말로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취미를 위해 성능 좋은 낚싯대나 골프채, 또는 PC 등을 구입하고 시간을 들여 이를 즐기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또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느끼는 일에 시간과 돈을 사용한다. 가지고 있는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시하는지를 알 수 있고, 이는 개인의 환경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면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가치관과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여행의 재미를 알기 전 나의 주요 소비처는 책이었다. 책을 사고 읽는 데 돈과 시간을 사용했다. 책을 읽으면 신기하고 새로운 지식을 잔뜩 배울 수 있었고 재밌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내 작은 세계에서는 본 적도 없는 수많은 일들이 펼쳐졌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서점에 가서 매대 사이를 돌며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샀고, 주말이면 밥 먹고 숨만 쉬면서 맘에 드는 책을 읽었다. 소설에 꽂히면 소설만, 만화가 맘에 들 때면 만화를, 비문학 책에 푹 빠졌을 땐 비문학만. 내키는 대로 읽어댔다.     


그러다 여행을 만났다.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간 친구들을 만나러 간 여행이었는데, 보호자나 짜인 일정이 없는 자유여행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현지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일정을 직접 짜는 여행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잘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TV에도 종종 나오는 나라였고 책이나 수업 시간을 통해 관련 내용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본 중국이라는 나라는 완전히 새로운 곳이었다. 책으로 보는 것과 직접 그곳에 서 있는 건 느낌이 전혀 달랐다. 낯선 공기, 이해할 수 없는 언어, 새로운 글자, 나와 다른 생활 방식, 색다른 문화. 길가의 가로수도 달랐고, 심지어 햇빛까지 달라 보였다. 여행지에서 보고 느끼는 모든 게 다 자극으로 다가왔다.     


첫 여행 이후 내 소비패턴은 변했다. 여행을 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시간을 쓰는 게 즐겁고 가치 있게 느껴졌다. 대학원에 다닐 때는 빠듯한 생활비에 허덕이면서도, 식비를 줄이고 교통비를 줄여서 여행 경비를 마련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로 왕복하면 5파운드(당시 환율로 9,000원 상당) 정도가 들었는데 걸어 다니면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나는 기꺼이 걸었다. 운동도 되고, 여행 경비도 마련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모은 돈으로 저가 비행기 표를 싸게 사거나, ‘에든버러 편도, 9시간, 15파운드!’ 같은 이벤트 가격 장거리 버스표를 사서 최대한 여행을 가려 노력했다. 그래도 여행경비는 항상 부족해서 여행을 가면 한인 민박을 주로 찾았다. 한인 민박의 경우 대부분 아침을 잘 차려주시는데, 아침을 든든히 먹으면 점심을 굶어도 저녁까지 돌아다닐 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행을 가면 온종일 신나게 돌아다녔다. 학생 할인을 해주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탐방하고, 커다란 성당 앞에서 광장을 찾은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앉아서 노을에 쌓인 도시의 모습을 바라봤다. 도시를 대표하는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보거나,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시장이나 마트를 찾는 것도 큰 재미였다. 전직 기념품점 직원 겸 박물관 도센트의 경력을 살려서 여러 기념품 가게와 작은 박물관도 살펴봤다. 박물관과 기념품점을 몇 개만 돌아보면 그 도시가 누구 또는 어떤 건축물 덕분에 먹고 살고 있는지, 어떤 점을 자랑스러워하는지 등을 금방 알 수 있다. 거리 악사들의 공연도 도시마다 다 달랐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정말 행복했다. 그날 하루 눈에 담고 온몸으로 느꼈던 세상이 신기하고 재밌어서 어쩔 줄 몰랐다. 



         


한번은, 막 여행에서 돌아온 뒤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었다. 그는 책도 많이 읽고 자기계발에도 열심인 사람이어서, 늘 대화거리가 풍족했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대화를 이어갔는데, 아무래도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지라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아, 이번에 다녀온 여행 정말 좋았어. 다시 생각해도 행복하네. 또 가고 싶다.”     


나는 그가 언제나처럼 가볍게 대꾸하고, 관련 대화가 이어질 거로 생각했다. 내가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가 자기계발에 관해 이야기할 때처럼. 그런데 그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했다.       


“여행이 왜 좋아? 뭐가 좋은 거야?”     


질문의 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황스러운 내 표정을 본 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니, 정말 궁금해서. 나는 여행을 가본 적이 없거든. 그게 왜 좋은 건지 모르겠어. 그냥 가서 여행지를 구경하고 오는 것뿐이잖아. 여행을 다녀온다고 돈이 생기거나 직장에서 몸값이 높아진다거나, 뭐 그런 효용이 있는 건 아닌데, 대체 뭐가 좋은 거야?”     


순간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좋음과 내가 말하는 좋음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우린 서로 다른 영역을 말하고 있었다.       


여행을 통해 얻는 것들은 연봉을 올리거나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쁨이다. 여행을 다녀온다고 당장 통장에 돈이 생기거나, 월급이 올라가거나, 몸이 더 건강해지진 않는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 정서적, 감정적으로도 훨씬 풍성한 순간을 누릴 수 있고, 수많은 낯선 자극들이 우리가 평소에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던 감각을 깨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세상을 마주할 때처럼 당신의 뇌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정보와 느낌, 감각을 흡수하고 처리할 것이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다시 찾고, 처음 보는 모양과 처음 맡아 보는 향이 가득한 음식을 접하게 될 거다.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상식이 비상식이 되는 것도 보게 되고, 이해하기 힘든 규범도 만나게 된다. 그 속에서 당신은 새삼 모든 것을 다시 낯설게 찬찬히 관찰하게 될 거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지금껏 익숙하게 여겼던 개념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익숙한 환경과 습관에서 단절되는 순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감각이 깨어나면 당신이 오랫동안 원해온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가슴이 뛰는지, 오래된 상처가 어떻게 당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 알게 될 수도 있다. 평소에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었던 가로등 너머의 밤하늘이나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주말 아침 주택가의 풍경 등을 바라보는 동안 바쁜 일상 속에 고갈되어버린 당신의 내면도 조금씩 다시 채워질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휴식을, 누군가는 회복과 위로를 얻고 누군가는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누군가는 영감을 얻는 시간이 지나간다. 때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이나 오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도 한다. 그렇게 얻은 것들은 분명 돈 얼마 이상의 가치가 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내가 느꼈던 정서적 풍성함과 감각적 자극, 교훈, 깨달음, 가능성 같은 걸 전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말로 하는 설명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결국, 나는 그에게 여행이 왜 멋진지 이해시키는 데에 실패했다. 그는 애써 내 설명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지만, 마지막까지 그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 좋은 걸, 이렇게 행복한 걸 제대로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그의 모습에서 여행을 가기 전의 내가 보였다. 학부 시절, 동기들이 방학을 맞아 너도나도 배낭여행을 간다, 호텔팩을 알아본다고 바쁠 때도 나는 전혀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런 걸 왜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수백만 원을 쏟는 것이 어리석어 보였다. 다녀온 사람들에게서도 딱히 큰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아르바이트하고 책을 읽기로 한 내 결정이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친했던 친구들이 다들 중국으로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가는 바람에 그들을 보러 중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결국 여행의 힘, 여행의 매력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 ‘첫 여행’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첫 번째 자유 여행 이후 여행은 내 삶에서 상당히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됐다. 신용카드는 할인이나 일반 포인트 적립보다는 항공 마일리지 적립에 특화된 카드를 사용했고, 휴가를 낼 수 있을 때는 꼭 해외가 아니더라도 최대한 여행을 하려 애썼다. 원래도 쇼핑에 소질이 없었지만 새 물건에 대한 소비가 많이 줄었다. 물건을 살 때보다 여행에 돈과 시간을 사용할 때 더 많은 만족을 느낀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쇼핑에 돈과 시간을 쓰는 것도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의 디자인과 마케팅 노력이 들어간 물건을 소비하고 소유하는 건 아주 매력적이고 즐거운 일이다. 다만 행복감의 지속 시간과 이후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있어서 여행이 쇼핑보다 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뿐이다. 물건을 산 뒤에 우리는 곧 익숙해진다. 물건을 살 때의 설렘은 익숙함 사이로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익숙하고 평범해서 아무 감흥이 없는 물건만 남는다. 하지만 여행은 다르다. 여행하는 동안은 물론이고 여행이 끝난 뒤에도 내 안에 남아 다양한 형태로 그 흔적과 존재를 드러낸다.      


다녀온 뒤 한참이 지나 여행 기억을 잊고 있다가도 옛 사진을 볼 때, 여행지의 기차 티켓이나 여권 도장을 볼 때 다시 한번 그때의 설렘, 추억이 떠오른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내 모습이 여행 전과 조금 달라졌다고 느낄 때도 설명하기 힘든 기분 좋음을 느낀다. TV에서 내가 다녀갔던 여행지에 대한 프로그램을 할 때 나는 훨씬 더 입체적인 감정을 느낀다. 쇼핑도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이렇게 길게, 다양한 방법으로 내 감정과 삶에 극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그 풍족함의 시간과 양은 여행이 월등히 높았다.      






심리학자 제이미 커츠는 자신의 저서 <현명한 여행자로 사는 법>에서 돈을 어떻게 사용했을 때 심리적으로 더 많이, 그리고 오래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설명한다. “행복에 관한 확실한 조언이 하나 있다. 물질적인 것보다 경험을 사는 데 돈을 쓸 때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을 물건이 아닌 여행에 쓰고 있다면 이미 행복을 향한 길에 접어든 것이다.”       


여행에 너무 많은 돈을 사용하느라 일상에 무리가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여행에는 반드시 끝이 있고, 돌아올 일상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거다. 일상을 제대로 꾸리지 못하면서 여행만 자주 다녀봤자 여행의 효용과 아름다움은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게 일상을 유지하는 데 쓰일 돈을 제하고도 조금의 여유분을 모을 기회와 힘이 있다면, 그 돈을 물건을 사는 데에 사용하기보다는 용기를 내어 ‘첫 여행’을 시작하길 권한다. 그 경험이 당신에게 새로운 기쁨, 다채로운 세상, 건강한 이해를 선물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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