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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May 22. 2023

모든 걸 아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행

넌 반드시 이겨낼 거야. 약속하마. 날 믿으렴.


석사 졸업이 확정된 뒤, 학교로부터 졸업식에 참석할 거냐고 묻는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조금 고민이 됐다. 사실 내가 졸업한 학교의 석사 졸업식은 굳이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졸업식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유럽에 거주하지 않아 참석이 어려운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졸업식이 논문 제출 후 1년 가까이 지난 시기에 열리기 때문에 이미 취직한 사람들은 참석하기가 더욱 쉽지 않다. 실제로, 친했던 동기 대부분이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도 졸업식에 참석한다면 상당히 무리한 스케줄을 감수해야 했다. 졸업식을 위해 한국에서 출국해야 하는 날이 4주 동안의 아프리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졸업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무리한 일정임에도 참석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이었다. 


석사까지 공부했지만 부모님께 학사모 한번 씌워드리지 못한 게 죄송했기 때문이다. 나는 학부 때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창 ‘졸업식을 굳이 해야 하나’ 같은 생각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 머물며 만났던 현지인 친구들이 학부 졸업식 없이 졸업장만 받는 걸 몇 번 봤고, 휴학 기간이 길어서 한국에서 친한 동기들은 이미 다 졸업한 뒤라 졸업식에 가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굳이 졸업식에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 부모님도 외할머니도 내 졸업식에 가고 싶어 하셨는데, 그때만 해도 이 철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내 졸업식 = 내 문제’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졸업식 참석을 권하는 어머니께 “졸업식을 왜 해야 해? 그거 안 간다고 졸업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석사 진학을 할 거니 여기서 공부가 끝나는 것도 아닌데?” 같은 소리나 해댔다. 


당시 부모님이 얼마나 서운하셨을지. 내가 이렇게 철이 없었다. 정말 나만 생각했다. 딸의, 손녀의 대학 졸업을 함께 축하하고 기념하고 싶었던 부모님과 할머니의 마음은 정말 요만큼도 알지 못했다.  

   

뒤늦게야 죄송한 짓을 했다는 걸 알게 된 내게 석사 졸업식은 유일하게 남은 ‘만회할 기회’였다. 나는 꼭 부모님을 모시고 졸업식에 참석하겠다고 다짐했다. 때마침 일이나 공부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있던 우리 가족이 오랜만에 함께 모일 수 있게 되니, 졸업식 참석 겸 가족 여행으로 떠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런던에서 졸업식에 참석하는 김에 평소에 따로 오기 어려운 에든버러 인근도 둘러보기로 했다. 비용은 취직해서 돈을 벌기 시작한 나와 동생이 준비했다. 사실 나는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모아놓은 돈이 많지 않았지만, 나보다 먼저 일을 시작했던 둘째가 도와줘서 가족 여행이 성사될 수 있었다.   

  

여행 계획을 가족들에게 말했을 때, 어머니는 비용이나 일정 등을 걱정해서 망설이시긴 했지만 큰딸의 졸업식 참석과, 아주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가는 여행이라는 점, 그리고 이제 돈을 벌기 시작하는 두 딸이 추진하는 가족여행이라는 점에 결국 승낙해주셨다. 막내 동생도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아버지만 남았는데, 아버지의 승낙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요 몇 년 아버지와 대화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원래 여행을 좋아하신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릴 때도 늘 가족들을 데리고 여행을 다니셨고, TV에서 여행 프로그램을 하면 빼놓지 않고 시청하시며 어디 어디에 꼭 가고 싶다고도 하셨으니까. 우리 가족 중에 여행에 가장 적극적인 분이시니 여행 계획을 말씀드리면 바로 좋다고 하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당연히 바로 알겠다고 하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안 가겠다고 버티시는 거다! 


일 때문에 일정을 맞추기가 어려우신 걸까 물었지만 그건 아니라셨다. 뭐야, 그러면 별 거 아니잖아. 일정은 뺄 수 있는데 여행은 안 가시겠다니, 아무래도 자식들이 부담해야 할 여행비용이 걱정스러우셨나 보다. 우리는 안 가겠다고 버티시는 아버지를 강권해서 결국 여행을 가시도록 했다. 아버지 여권도 새로 발급받고, 여행 준비는 착착 이루어졌다.      






그렇게 떠난 가족여행은 대성공이었다. 나는 드디어 졸업 가운과 학사모를 입은 채 부모님과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부모님께 학사모도 씌워드렸고, 학교 졸업식에 학사모를 쓰는 전통이 없어서 대학을 졸업해놓고도 학사모를 써보지 못했던 동생도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어봤다. 


에든버러 여행도 정말 즐거웠다. 가족들은 탁 트인 하이랜드 전경 앞에서, 아기자기한 작은 골목에서, 아이스크림 트럭 앞에서, 함께 음식을 해 먹던 숙소에서 참 많이 웃었다. 


아버지는 유독 시원하게 펼쳐진 하이랜드의 들판을 한참 동안 바라보셨고, 조용한 에든버러 시내를 퍽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가니, 여행 초기의 어둡던 아버지 표정이 다행히 조금씩 편안해졌다. 행복하게 다녀온 가족 여행. 많은 곳을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함께하니 즐겁고 행복했다.    

  

그런데 돌아오고 얼마 안 돼서, 이런 행복한 기억은 생각도 안 날 만큼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의 빚 문제였다. 


아버지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야 빚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렸다. 그렇게 확인한 빚은 우리에겐 너무 큰 금액이었다. 빚이 온갖 곳에 있었다. 이자에 이자가 무섭게 붙었다. 아버지는 얼마 뒤 추심을 당하고 있다는 말씀도 했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렇게 여행을 안 가겠다고 하셨던 거다. 상황이 그 모양이라면 정말로 여행은 안 가는 게 맞았으니까.


온갖 생각과 감정이 휘몰아쳤다. 놀랐고, 걱정됐으며, 동시에 무섭고 화도 났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아버지가 안쓰러우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일이 원망스러웠고, 상황이 기가 막혔다.     






상황은 정신없이 우리 가족을 몰아쳐 갔다. 온갖 문제들이 득달같이 몰아쳐 대며 우리를 흔들었다. 부모님의 다투는 소리, 소리 지르는 아버지 목소리, 어머니의 울음소리 같은 것들이 매일 밤 이어졌다. 아버지는 추심을 피해 집을 떠나있을 때가 잦았고, 어머니는 아침마다 눈물에 부은 얼굴로 출근길에 나섰다. 막 군대에 간 막냇동생에게는 차마 상황을 알릴 수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를 다독이며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동동거렸다. 밤낮으로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보고, 변호사를 찾고, 지원 방안이나 법조문을 뒤졌다. 어떻게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가족들은 최선을 다했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아버지가 추심을 피해 집을 떠나있던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최선을 다해 가정을 지켰다. 하지만 기도할 때만큼은 하나님 앞에서 속상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우셨다. 매일 아침 이어졌던 새벽 기도는 더욱 깊고 절박해졌다.     


그런 하루하루를 견디다 보면 문득 울고 싶어지는 날이 있었다. 어딘가에 가서 속 시원하게 펑펑 울어버리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울 곳을 찾지 못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 울자니 식구들이 걱정할 것 같고, 사람 없는 곳도 잘 모르겠고, 괜히 친구들을 붙잡고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날 내 숨을 튀어준 건 하나님과 함께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더듬어보는 일이었다. 


사실 처음엔 그저 배운 대로, 어려울수록 감사하라고 배웠으니 감사할 점을 찾아보려고 억지로 노력했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찾아보니 신기하게도, 정말 상황과 상관없이 감사할 점이 많더라. 


우선 가족들이 모두 무사했다.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보다 일이 더 악화하기 전에 상황을 알게 됐다는 점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학생일 때가 아니라 그나마 취직해서 돈을 버는 중이라는 것도 감사할 거리였다. 그 외에도 정말 수많은 감사 거리가 있었다.   

   

그렇게 감사한 점을 하나둘 꼽고 있으니 생각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가 닿았다. 그게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모른다. 


맞다. 우리에겐 여전히 하나님이 계셨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무엇보다 크시다. 태산처럼 보이는 지금 이 문제도 절대로 하나님보다 클 수 없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건 심적 안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 가족이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있고, 이것이 결코 변하지 않을 사실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숨을 쉬었다.   





  

그렇게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려던 때, 고비는 또다시 찾아와 우리를 흔들었다. 이번엔 갑자기 내 직장에 문제가 생겼다. 갑작스러운 상사와의 독대 후, 나는 당장 아프리카로 몇 년 장기 파견을 가거나 연구소를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다. 파견을 가지 않으면 고용 계약 연장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일주일 안에 결정하라는 통보를 들었을 때는 정말 숨이 막혔다. 입사할 때 해외 파견직이 아닌 국내 사무직으로 입사했고, 해외 출장도 1년 최대 4회까지라는 확인을 받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몇 년간의 해외 장기 파견이라니. 그때가 입사한 지 막 열 달 정도가 됐을 때였다. 


파견 가라는 보직도 원래 내가 하던 일과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아버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식구들만 두고 갈 수가 없었다. 파견을 못 간다는 내게 상사는 이유를 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결국 대답을 못 했다. 나는 그렇게 입사한 지 11개월 만에 연구소를 떠났다. 벼랑 끝에 겨우 매달려 있던 손이 밀쳐진 것 같았다.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먹먹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책장에 꽂혀 있는 사진첩이 눈에 띄었다. 몇 달 전 가족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걸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나 자신을 향한 한심함과 어처구니없음이었다. 


조소가 절로 나왔다. 멍청하게, 상황이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속 편하게 여행이라니. 사진 속 행복한 내 얼굴이 그렇게도 멍청해 보이고 우스울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도 모르고 참 바보 같기도 하지. 그러다 생각이 또 하나님께 가 닿았다. 하나님은 모든 걸 다 아신다는데, 왜 우릴 막지 않으셨을까? 다 알고 계셨으면 좀 막아주시지.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 가족은 여행을 앞두고 꽤 열심히 기도했었다. 여행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음에 또 감사 기도를 드렸다. 당연히 그 여행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이루어졌고, 여행지에서 누린 기쁨과 추억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모든 걸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 상황이 이렇다는 걸 모르셨을 리 없는데, 대체 왜 우리의 여행을 허락하셨던 걸까? 왜 이 모든 문제가 수면으로 드러나기 직전에, 돈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닌 해외여행을 가게 두셨을까? 곧 큰 빚이 드러나서 그걸 갚느라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 될 텐데 못 가게 막으시고 얼른 상황을 알려주셔서 그 돈을 빚 갚는 데 쓰게 하셨어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다녀온 여행이 반드시 가야 하는 필수적인 여행도 아니었다. 부모님께 졸업식 사진을 선물해드리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게 집안의 빚 문제에 비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지 않나. 이 모든 일이 밝혀지기 전에 우리 가족이 여행을 다녀온 게 단순히 우연인 것 같지 않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는 꽤 오래 사진을 바라보게 됐다. 그러고 보니 사진 속 가족들 표정이 참 밝다. 모두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지친 얼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움과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렇게 추억에 잠겨 사진을 넘기던 중 갑자기 예상치 못한 사진이 튀어나왔다. 아버지의 여권 사진이었다. 가족 여행을 가기 전에 새로 여권을 만들면서 찍었던 여권용 증명사진 말이다. 


그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너무 많이 지치고 피곤한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문득 왈칵 눈물이 터졌다. 사진 속 아버지가 너무, 정말 너무 힘들어 보였다. 


'아, 아빠 얼굴이 이랬구나....... 이렇게 힘들었구나. 그걸 나는 하나도 몰랐구나.'


아버지의 여권 사진과, 여행지에서 찍은 아버지의 얼굴을 비교해 보았다. 두 사진을 함께 보고 있자니 말로 다 할 수 없는 애잔함에 속이 아렸다. 안쓰럽고, 미안하고, 힘들고. 


여행지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은 여권 증명사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푸른 초원 위에서, 한가로운 공원에서, 조용한 골목길에서 아버지 얼굴에 조금씩, 조금씩 웃음이 피고 있었다.     






아, 이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행을 허락하셨던 거구나. 


우리가 떠났던 여행의 이유를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던 수면 아래의 사정을 다 알고 계셨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한 아버지가 혼자 끙끙 앓던 그때,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걸 아셨다. 


코너에 몰릴 대로 몰린 아버지가 얼마나 지쳐있었는지, 그래서 무슨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지 전부 다 아셨던 하나님은 선하신 뜻으로 우리 가족에게 여행을 허락해주셨고, 그 덕분에 아버지는 잠시 문제로부터 도망쳐서 마음을 쉬고 가족들과 함께하며 두 발을 다시 땅에 묶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거다.     


그러고 보니 일과 공부로 오래 떨어져 있던 우리 가족이 함께 모인 것도 그 여행 덕분이었다. 꽤 오랜만에 함께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행이 끝난 뒤 거의 바로 문제가 수면위로 드러났고, 우리는 서로의 버틸 곳이 되어주었다. 


문제 앞에 우리는 정말 나약했고, 모든 선택지가 살얼음판 같았다. 믿기지 않았지만 우리는 정말 찢겨나가기 직전이었다. 찢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주어야만 했다.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를 악물고 서로를 붙잡았다. 


만약 서로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다. 각자 떨어져서 이 문제와 싸워야 했다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어쩌면 누군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족을 한 곳으로 불러 모으셨나 보다.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을 누구 하나에게 미루거나 전가해두는 게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함께 버텨나갈 수 있도록. 곧 들어가게 될 어두운 터널에서 서로를 꽉 붙잡고 함께 견딜 수 있도록 가족들 모두가 함께하는 시간을 갖게 하신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순간 확신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우리는 정말 괜찮겠구나.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고,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걸 확인받은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단언했다. 하나님이 이 일을 분명히 잘 끝내주실 거고, 그날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게 될 거라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연이란 없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허락하심 하에서 이루어졌고 이루어질 것이다. 당연한 수순으로 이 일의 끝도 그 분의 계획하게 있으리라.     

여전히 상황은 엉망이고, 닥친 문제 중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내 얼굴은 지금도 눈물범벅이지만, 가슴 속에 기이한 기대 같은 게 단단하게 모양새를 갖춰갔다. 


사실 그때 느낀 것을 ‘기대’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확신이라기에는 조금 작고 연약했지만, 희망보다는 훨씬 크고 단단했으며, 기대라고 하기에는 말랑거리지 않아 또 확신에 가까웠다. 그런 감정과 함께 나는 묘한 자신감에 찼다. ‘우리가 이 어려움을 이길 거야. 상황이 반드시 나아질 거야.’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내 생각이 이상한데, 그 이상한 생각이 신기하게 믿어졌다. 마음에 감사와 평안이 몰려왔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뒤로도 몇 년간, 우리 가족은 꽤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었다. 


많이 울었고, 감정적으로 격해졌으며, 서로를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 때도 있었다. 우리가 처한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경제적인 문제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훨씬 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 경제적 문제처럼 보이는 상황을 통해 훨씬 더 복잡하고 오래된 우리 가정의 병폐들을 다루고 계셨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잘못을 기어이 눈앞에 끄집어내어 마주하게 하셨고, 불편하고 힘들어도 억지로라도 가족 간에 소통이 강화되도록 이끄셨다. 외면해왔던 서로의 약한 모습을 직접 봐야 했고, 하나님과 훨씬 더 가깝고 끈끈한 관계를 구축하게 하셨다. 그리고 결국,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터널에서 꺼내주셨다.     





많은 것을 고치기 위한 시간이 시작되기 전, 하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우리가 여행을 가도록 허락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문제를 끌어안고 죽어가는 가여운 사람을 도망쳐 숨 쉬게 해주셨다. 또한 이 과정을 함께 지나가야 할 우리의 손을 서로의 손에 포개주셨다. 


그 뒤 이어진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족을 부족함 없이 돌보셨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걸 끊임없이 보여주시고 안심시켜주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세밀하게 우릴 돌보셨다. 하나님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가. 하나님의 일하심은 사람의 인지를 얼마나 아득하게 뛰어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란 얼마나 상냥하고 다정한가.     


그동안 다닌 여러 여행 중 가장 의미 있었던 여행을 딱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이 가족 여행을 뽑을 것 같다. 내게 이 여행은 그 어떤 여행보다 하나님을 떠올리게 한다. 힘든 시간의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귀한 시간의 시작이기도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안전했다. 


하나님은 모든 걸 아시고, 계획하시고, 준비하셨으며 그 과정의 하나로 우리에게 여행을 허락하셨다. 문제가 눈앞에 드러났을 때 낙담하며 우는 우리를 달래고, 보살피고, 고치고, 먹이셨으며, 그 모든 과정을 지나는 동안 우리의 유일한 위로, 기대, 쉼, 희망, 안심이 되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무엇보다 크셨으며, 녹아내릴 듯 더없이 상냥하셨다. 이 여행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한지,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지를 절실히 깨닫게 해준, 기념비적인 시간의 시작이었다.     



[온전케되리] 라는 찬양 중 이런 가사가 있다.     


이제 눈 들어 주 보네.

그 능력 날 새롭게 해.

주님의 사랑 날 만지시니 내 모든 두려움 사라지네.

폭풍 속에도 주 붙들고 믿음으로 주와 걷네.

갈보리 언덕너머 그 어느 날 주 안에 온전케 되리.  

   

이 가사가 참 우리 상황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내 상황이나 문제와는 상관없이 모든 일이 괜찮아진다. 모순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무서워서 펑펑 울고 있는데도 하나님을 보면 정말 두려움이 사라진다. 분명 무서운데 무섭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인생에 폭풍이 치지 않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내 삶은 흔들리고 어렵고 때론 죽을 것 같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붙들고 있으면 한발 한발 걷게 된다. 하나님께 매달려서 펑펑 울다 또 위로받고 다시 또 울고 매달리고를 반복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하나님과 걷는다’고 쓰고 ‘하나님께 안겨 나온다’라고 읽는 동행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과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가르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나를 빚어 가신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또다시 예전 기억을 떠올려본다. 온기를 품은 기억들과 감사했던 순간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면, 그 하나하나에 모두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


를 돌보셨던 하나님, 나를 위로하셨던 하나님, 내게 기쁨과 추억을 선물하셨던 하나님, 나를 지키셨던 하나님, 안겨 울 곳이 되어 주셨던 하나님. 그 모든 순간 하나님이 거기 계셨다. 그리고 지금도 같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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