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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탐 May 22. 2023

한계,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

자식 숙제 해주고, 학교 보내고, 이제 회사 일도 봐주는 하나님

  

국제개발협력 일을 할 때 ‘베트남 미술 봉사 여행’을 기획한 적이 있다. 당시 베트남 지원 사업을 맡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노숙하다 구조되거나 가난 때문에 가정의 돌봄을 받기 어려운 아이들을 보호하는 ‘소녀 보호 시설’을 지원하고 모니터링 하는 업무도 있었다. 


그즈음, 나는 단순히 지원금을 보내는 기존의 익숙한 방식에 조금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이들을 안전한 곳에서 보살피며 먹이고, 입히기 위해 비용을 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무언가,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아이들은 결국 큰다. 언젠가는 시설 밖으로 나가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데, 지금의 지원 방식은 아무래도 그런 부분까지 커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이들이 시설을 떠나게 됐을 때 혹시 다시 가난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지금 하는 지원도 아주 귀하고 아이들이 노숙하거나 굶는 것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음을 모아 기부금을 보내주신 후원자들 덕분에 아이들을 긴급한 상황에서 보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에서는 꼭 필요한 것을 더 제공할 수 없다는 미안함과, 그런 핑계 뒤에 적당히 안주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 상주했다.     


어려운 사람들, 발전이 덜 되었거나 그 과정 중에 있는 지역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도와서 형편과 상황이 나아질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로 국제개발을 공부하고 일도 시작했는데, 현실은 전혀 그 이상을 따라잡지 못했다. 


나는 아이들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없었다. 그저 겨우, 당장 마주해야 할 상황을 유예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이었다. 그마저도 예산이 모자라 매번 허덕거렸고 말이다. 결국 아이가 지금 마주해야 할 상황은 사라지지 않았고, 조금 미루어진 채로 여전히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부단히 준비한 사람에게도 사회란 만만한 곳이 아닌데, 성인이 된 아이들이 시설을 나가게 되면 어떻게 생활하게 될까? 노숙하다 구조되고, 가난 때문에 버려졌던 아이들은 시설을 나가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하노이의 물가를 버티면서 생활비를 벌만한 직업을 아이들이 과연 얻을 수 있을까? 시설의 아이들 중에 고등교육까지 마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딱 한 번, 대학 장학금을 지원해주겠다는 후원자가 나타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시설의 아이들은 선정되지 못했다.     


나는, 그리고 내가 속해있던 단체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그게 한편으로는 슬프고, 또 한편으로 적당히 당연하고 익숙하게 느껴져서 무서웠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돈은 늘 부족하고,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그냥 평소 하던 일이나 제대로 하면 되겠거니, 했다. 계속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그렇다고 대안 없이 계속 떠들어댈 수도 없으니까. 무력감과 무덤덤함, 그리고 옅은 죄책감 섞인 회의감이 나를 여상하게 잠식해갔다.     


하나님께도 그런 마음을 솔직히 말씀드렸다. 


뭔가 더 좋은 대안을 찾아봐야 할 거 같은데, 솔직히 방법이 없어 보인다고. 사실 지금 하는 지원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돈과 일손은 늘 모자라고, 뭔가 해보려고 하면 일만 늘어나 피곤할 거 같아서 솔직히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그래서 마음이 괴롭다고. 그렇게 기도했다     






아이들에게 디지털 드로잉을 가르쳐주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여느 날 같이 이런 고민을 하며 터덜터덜 실려 가던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였다. 


꼭 그림을 대단히 잘 그리지 않아도 간단히 그려 이모티콘을 만들거나, 인터넷에 올려 광고 수익을 얻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론, 그래봤자 효과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뒤따라 머리를 스치긴 했다. 하지만 곧바로 반박하는 마음이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물질적인 수단, 오프라인의 수단을 쥐어주기는 어려워도 온라인을 활용하고 그 안에서 무언가 시도해볼 수 있도록 돕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혹시 잘 안되더라도, 아이들의 선택지가 다양해지면 좋지 않은가.


지하철이 동네에 닿고, 아무도 없는 밤의 육교를 건너고, 어느새 내 머리가 베개에 닿을 때까지. 나는 이를 프로젝트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이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온라인을 활용해서 수익을 내는 게 가능할까? 


하지만 아무래도 당장은 어렵겠다는 결론이 났다. 우선 현지 보호 시설에 그런 활동을 보조할 만한 인력과 역량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또한 그림을 온라인으로 옮길 장비도 없을 게 분명했다. 시설에는 디지털 드로잉을 위한 장비가 없었다. 또한 이 활동에 아이들이 흥미를 보일지도 문제였다. 아이들이 그동안 미술과 관련된 활동을 해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설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열 살 이하 어린이들이 이런 활동을 시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나는 목표를 훨씬 더 작게 잡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들이 실제로 미술 활동을 좋아할지 아닐지도 모르면서, 지금 단계에서 수익화 사업이나 직업교육을 고려하는 건 현실성이 없다. 그렇다면 우선 간단하게, 아이들이 미술을 접할 기회를 마련해주고 고학년 학생들에게만 디지털 드로잉 방법을 알려주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어차피 고학년은 몇 명 안 되니 그 정도의 장비는 우리 쪽에서 준비할 수 있을 거다. 잘만 가르쳐주면 시설 내에서 디지털 드로잉을 활용하는 학생이 한두 명 정도는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모르잖아, 그게 그 아이들에게 기회가 될지.     


그날부터 인터넷과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었고, 아동, 청소년 교육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참고할 만한 사례가 절실했다. 미술을 국제개발에 적용한 사례가 있을까? 개발도상국에서 시도한 교육 프로그램 중에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미술 교육이 있었을까? 하지만 만족스러운 자료는 별로 없었다. 미술 교육, 정확히는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는 미술 교육이 장기적으로 대상자의 소득 증대 등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룬 연구나 실제 사업 결과가 궁금했지만 안타깝게도 내 서치가 부족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미술을 국제개발에 적용한 논문을 하나 찾긴 했는데, 역시 디지털 드로잉 관련 내용은 아니었다.






고민이 계속됐다. 이 아이디어를 정말 실행으로 옮긴다면 과연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디지털 드로잉을 위한 장비는 마련한다고 쳐도, 해당 교육은 누가 맡나? 또한 고학년 대상으로 해당 교육을 진행하는 동안 미취학, 저학년 어린이들을 위해 프로그램은 어떻게 해야 하지? 


비용도 문제였다. 아무리 간단하게 시도한다고 해도 필요한 비용이 꽤 됐다. 사람도 가야하고, 장비도 마련해야 했다. 사업비를 마련하려면 후원을 받든가 외부 공모 사업에 신청해서 지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임시 프로젝트에 후원해줄 사람을 찾는 건 너무 요원해 보였고, 공모사업 선정 성공률도 낮아 보였다. 사업 모델이 어떻게 구체화 될 수 있고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설명해야 할 텐데 기존 사례도 없고 내가 관련 전문가도 아니라 설득력이 약했다. 거의 사업 사전 조사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사전 조사에 비용을 지원해주는 곳은 거의 없다.     


그러는 와중에도 기존의 업무는 끊임없이 몰아닥쳤고, 그 과정에서 ‘심증만 있고 확신은 없는’ 고민거리는 자연스럽게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모습이 내게 경각심을 갖게 했다. 


공부를 마치고 일을 시작한 뒤 매번 가슴 아팠던 건 열심히 배운 것과 현장이 너무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교실과 현장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이래선 안 된다’고 배운 것들이 현장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고민을 멈추고, 현장의 논리에 적응해서 기존 방식을 그저 답습하는 것 같은 내 모습이 무서웠다. 그런 두려움이 내 등을 떠밀었다. 이 고민을 그냥 묻어두지 말라고. 


‘안 될지도 몰라’, ‘이거 아니어도 할 일이 태산 같아’, ‘아무도 이런 걸 시키지 않았어’, ‘네가 이 분야에 대해 뭘 안다고 나서서 일을 만들어?’ 같은 목소리가 마음속에 계속 피어올랐지만, 그래도 역시 계속 미뤄두기만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여러 번 물었다. 점점 더 이 일에 마음이 쓰였고, 정신 차려보면 생각이 어느새 그리로 흘러가 있는 걸 발견할 때가 많았다. 바빠서, 혹은 그냥 별거 아닐 거 같아서 넘겨버린 생각이 혹시 아이들에게는 귀중한 선택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기도가 먼저였는지, 마음이 먼저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나는 결국 그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우선 시도 해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 하자. 내 역량이 부족해서 문제라면 규모를 작게 꾸리면 될 일이다.   





  

상사에게 베트남에 갈 일회성 미술 봉사단을 만들겠다고 기안을 올렸다. 제목은 <베트남 미술 봉사 여행>. 말 그대로 봉사단을 모집해서 ‘미술’을 주제로 한 활동을 하고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장비를 가져가서 고학년 학생들에게는 디지털 드로잉을 가르치고, 저학년 아이들이 미술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다녀온 결과가 괜찮다면 그를 바탕으로 다음 연도 공모 사업에 해당 내용으로 지원해보겠다고.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감사하게도 상사와 회사는 내 기획안을 받아들여 줬다. 회사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예산은 한 푼도 없었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일손 부족한 스타트업 NGO에서 실무 직원 하나를 일주일 가까이 업무에서 빼주고, 해당 프로젝트를 단체의 이름으로 진행할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그렇게, 미술 전공자도 교육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이끄는 ‘미술 봉사단’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역시, 라고 해야 할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봉사단원 모집부터 난항이었다. 모집 공고를 내걸었지만,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 하고, 일정도 상당히 빡빡해서였을 것 같다. 우리가 떠나기로 한 봉사 여행은 말이 여행이지 사실 일정 대부분이 봉사 활동으로만 꽉 들어차 있었다. 설렁설렁 해외여행을 즐기며 잠시 봉사하는 기분만 내는 활동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래서일까? 원래도 소규모로 모집할 생각이었지만, 이건 뭐. 지원자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마감일이 다가오자 마음이 슬슬 불안해졌다. 이러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으면 어쩌지? 회사에 이미 다 말해두고 대표님 결제까지 싹 받았는데, 지원자가 없어서 기획을 접어야겠다고 하면 상황이 대단히 난감해진다. 

    

나는 시무룩해져서 기도했다. 


‘하나님, 왜 사람들이 지원하지 않죠? 혹시 제가 또 착각해서 괜한 헛짓거리를 하고 있나요?’ 


계속 진척이 없으니 온갖 생각이 다 들고, 기운이 빠졌다. 이 일을 계속 추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 수 없어 더 답답했다. 하지만 기도 끝에, 우선 확실히 ‘NO’ 사인을 받은 건 아니니 되든 안 되든 마지막까지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봉사단 홍보물을 인터넷 여기저기에 게시하는 데 중심을 뒀다면, 이제는 직접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베트남으로 갈 미술 봉사단을 꾸리는데, 관심 있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좀 알려달라고. 다행히 그때부터 조금씩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곱 명의 지원자가 모였다.      






최종적으로 참가가 확정된 봉사단원들은 두 명의 일러스트레이터와 다섯 명의 대학생. 아무리 모집 공고를 올려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맘 졸이며 기도했던 걸 기억하는 나로서는 이들이 모이게 된 게 결코 당연해 보이지 않았다. 비율도 딱 좋았다. 디지털 드로잉 수업을 해줄 수 있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둘, 미술 심리상담을 전공한 미술 전공자 하나, 미취학이나 저학년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어울려줄 대학생 넷.


 어쩜 구성도 이렇게 딱 맞게 모였는지.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시고 도와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완전 프로젝트 맞춤 인력들 아닌가.      


신기하게도 모인 사람들 모두 나름대로 이번 봉사단에 ‘참가하기 힘든’ 사정을 가지고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 D는 쌓여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봉사 여행 같은 걸 갈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자신의 재능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이번 여행이 미술, 그것도 디지털 드로잉을 다루는 활동이라는 말에 참가를 결심했다고 했다. 전문성을 살려서 아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라면 바빠도 참가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D는 이 여행에 참여하기 위해 한 달 가까운 작업 시간을 조정했다. 

     

또 다른 일러스트레이터 K는 미국에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다. D를 통해 봉사단 이야기를 들었고, 참여를 위해 12시간을 날아 한국까지 왔다. K는 잠깐 서울에 머무는 동안에도 시간을 쪼개서 업무 미팅을 다녀야 할 정도로 바빴다.


대학생 다섯 명도 바쁜 시간을 쪼갰다. G와 Y는 각각 발레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는데, 방학을 맞아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둘은 학원에 양해를 구하고 보충수업을 하는 등 미리 수업 시간표를 조정해서 봉사 여행에 참가했다.     


다른 사람들 사정도 비슷했다. M은 한창 정신없이 아르바이트 중이었고, J는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T도 진로를 위해 관련 훈련을 받으면서 식단조절을 하는 등 몸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 셋 역시 봉사활동 참가를 위해 모든 스케줄을 조정했다. 일곱 명 중 단 한 명도, ‘마침 시간이 남아서’ 참여한 사람은 없었다.     

 

이들이 봉사단에 참여해서 얻을 이득도 딱히 없었다. 내가 봉사단원들에게 줄 수 있었던 건 ‘봉사 시간’ 정도였는데, 참가자 대부분은 이게 별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여행 자체의 메리트도 없었다. 이름만 <봉사 여행>이지 사실 여행 스케줄도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하루 일정을 마친 뒤 주변 시장을 돌아보거나, 아이들이 미술관이나 인형극 관람을 할 때 단원들도 같이 참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다들 ‘내 돈, 내 시간을 들여 하는 빡빡하고 힘든, 남 좋은 활동’에 기꺼이 지원해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일곱 명의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베트남으로 향했다.      






봉사단이 하노이에 도착했을 때는 8월 말.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우리의 활동 장소는 아이들이 사는 4층짜리 보호 시설 건물이었다. 작은 건물에는 프로그램을 진행할만한 넓은 방이 따로 없어서 우리는 아이들을 몇 그룹으로 나눈 뒤 방마다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식으로 공간을 활용했다. 


1층 주방에서는 발레리나 G의 동작을 보고 특징을 빨리 잡아내 그림으로 옮기는 ‘스피드 그리기 게임’을, 2층 침실에서는 Y가 1:1 미술 심리검사를 진행했고, 바로 옆 교무실에서는 D와 K가 고학년들을 대상으로 ‘디지털 드로잉’을 가르쳤다. 3층 침실에서는 M이 미취학 아이들과 함께 팔찌 만들기 놀이를 진행했고, 1~3층 프로그램을 마친 아이들은 순서대로 4층 공부방에 모여서 J, T와 함께 그림 달력을 만들었다.    

  

건물 환경은 쾌적하지 않았다. 침실 벽에는 개미가 줄지어 기어 다녔고, 4층 건물에 딱 하나 있는 화장실은 아주 지저분했다. 복도에는 먼지가 가득해서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양말 바닥이 새카매졌다. 방에는 냉방시설도 따로 없었다. 선풍기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건물 전체에 딱 두 대 뿐이었다. 게다가 40도 가까운 폭염까지. 


그런 환경에서도 봉사자들은 4층 건물을 오르내리며 정말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봤다. 돌아갈 때가 되면 이미 옷은 땀으로 잔뜩 젖고 온몸이 끈적끈적했지만 누구 하나 덥다고 불평하지 않았고, 힘들다고 빼지 않았다. 다들 많이 웃었고 정말 열심히 매일의 일정을 소화했다.     


며칠간 함께 밥을 먹고, 같이 이런저런 활동을 하니 우리는 아이들과 금방 친해졌다. 발레리나 봉사자의 동작을 따라 그리다가 어느 순간 다 같이 춤을 추며 웃었고, 서로를 많이 안아줬다. 


매달리고 안기는 아이들을 이끌고 근처 인형 극장과 미술관으로 소풍도 갔다. 아이들은 잔뜩 들떠서 어쩔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게 시설이 생긴 뒤 처음 가는 단체 소풍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인형극도 미술관도 모두 처음이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따라 그리고, 곳곳에 숨어있는 봉사자들을 만나 스티커도 받으며, 아이들은 즐겁게 미술을 즐겼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미술과 예술에 대한 좋은 기억과 감정을 심어주고 싶었고, 쉽고 편하게 그릴 수 있길 바랐다. 그러다 보면 혹시 누군가에게는 이게 새로운 선택지로 이어지는 길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함께 어울리고, 안아주고, 처음 해보는 것들을 하며 많이 웃다 보니 어느새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8월의 마지막. 유독 뜨거웠던 여름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나는 다시 서울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쾌적한 사무실에 앉아 결과 보고서를 쓰고 예산 내역을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봉사단원들에게 나눠 줄 사진집을 만들었다. 


사진 속 얼굴들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환하게 웃는 단원들 얼굴이 땀으로 잔뜩 번들거렸다. 그런데도 그 모습들이 어쩜 그렇게 멋지고 보기 좋던지. 그 덥고, 습하고, 깨끗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 사람들 덕분에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던 봉사 여행이 무사히, 잘 마무리됐다.   

  

문득 초반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잔뜩 고민하며 심각했던 나,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걱정하던 나. 과연 이렇게 적은 예산과 인력으로 일정이 제대로 진행은 될까, 여행 일정이 너무 없다고 참가자들이 불평하면 어쩌지 등등 온갖 고민과 불안함에 발을 동동거렸던 과거의 내 모습을 생각하니 다른 의미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좋게 잘 끝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는데, 지금은 모든 일정을 끝내고 웃으며 사진첩을 만들고 있다.      


여행을 다니며 하나님과 가장 자주 했던 수업 중 하나가 이렇게 한계에 부딪힐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전에도 몇 번 배웠던 것 같은데, 여전히 배움이 부족한지 이번에도 기도해놓고 염려하고,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불안해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 그런 내 앞에 자신의 일하심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도우심은, 목격할 때마다 그리고 깨달을 때마다 참 놀랍고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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