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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the record Dec 13. 2024

21. 기보사서 오리엔테이션 3

기억을 빌려주는 도서관

       




#1     



현수의 질문에 꽃분 이모는 또 잠시 말이 없어졌다.

아까 꽃분 이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따로 할머니와 통화를 했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꽃분 이모: 어머!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음~ 진짜로 죽는 건 아니고.

기보사서를 하면, 만월의 밤에만 잠깐? 깊게 잠을 자는 정도야.     


현수: 네, 이모.     


꽃분 이모: 에휴. 

아까 망자의 기억 박스를 보고도 니가 아무 말이 없어서 하는 말이야. 

혹시 모르니, 

피의 계약을 하게 되면 현수 넌 만월 날은 만월 도서관 뒤에 있는 도서관 관사에서 하루 자야 할 거야.

아무래도 민가보다는 관사가 안전하니깐.

악귀나 잡귀가 니 몸을 탐낼 수 있거든!     


현수: 네, 제가 그 박스에서 뭔가 보였어야 하는 건가요?     


꽃분 이모: 응.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거야.

피의 계약은 홍 여사님한테는 우선 내가 말해놨어.

어쨌든 한 달에 1번씩은 네가 죽은 것처럼 보이게 깊이 잠이 드는 거라서.

사는 게 다 이렇게 변수가 많네.

기보 사서를 받아들일지 한번 잘 생각해 봐.     


현수: 네...               



현수에게 깊이 잠이 든다는 건 솔직히 좀 무서운 일이었다.

설희네에서 헤드폰 때문에 영혼이 빠져나간 그 사건 이후부터 그랬다.      

사실 현수는 그래서 잠이 깊이 드는 그 순간을 무척이나 무서워했다.

현수에게는 잠이 드는 느낌이 영혼이 빠져나갈 때와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현수는 늘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선잠을 잤다. 

미세하게 깨어있는 그런 얕은 잠을 현수는 늘 자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현수는 홍 여사에게도 꽃분 이모에게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병원에 들락날락했던 현수였다.

과호흡이 시작되고는 정신과 상담부터 심리 상담까지 온갖 진료를 받으며 커왔다.

여기서 병을 하나 더, 더하는 건 홍 여사에게 못 할 짓 같았다.     

그래서 그냥 아침잠이 좀 많은 스타일로 여태 지냈던 현수였다.               



꽃분 이모: 사실 나는 니가 피의 계약을 안 해도 바로 될 줄 알았어.

현수 너는 어릴 적에 귀신도 봤었고, 또 타인의 기억도 보고 빌려줄 수도 있잖아.

저승 신분패로 니 능력을 너무 눌러놓은 건지...     



현수: 제 능력을 눌러 놨다구요?     


꽃분 이모: 저승 신분패는 원래라면 보여야 할 걸 안 보이게 하는 거니깐.

 능력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서 뚜껑을 꽉 닫아 놓은 것 같은 역할이거든.

홍 여사님 생각도 그렇고.     


현수: 네.

이모,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꺼내시는 거에요?     


꽃분 이모: 그게 말이지.

피의 계약을 하면 그건 저승과 종신 계약이 되는 거라서 그래.

정년이 될 때까지 아니다 죽을 때까지, 너는 기보 사서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어.     


현수: 네?

종신 계약이요?               



현수는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기보 사서 일을 하기 위해서 종신 계약을 해야 한다니!

꽃분 이모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직업은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평생 직장이란 게 없어진 이승인데... 종신 계약이라니!

사서가 국가직이나 지금 당장 평생 직장을 결정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꽃분 이모: 에휴.

이게 현수 니가 환등기만 보여도 안해도 되는 계약인데 말이야.

왜 안 보이는 건지!     


현수: 네...

(혼잣말로) 환등기라니 무슨 말이지?                    





#2     



꽃분 이모와 현수가 어색하고 답답한 감정을 반복하고 있던 그즈음, 오 관장님이 등장했다.

커다란 짐을 양손 가득 들고!               



오관장: 이모님~ 손 좀 빌리러 왔어요.

어! 현수군, 이제 괜찮아?     


현수: 아! 안녕하세요. 

(일어나서 인사하며) 오관장님.     


꽃분 이모: 어~ 오관장.

매점은 좀 괜찮아?     


오관장: 네네.

염사서가 잘해주고 있어요.

이거 늘 하던 건데 이모님이 하시던 거라서... 

제가 하는 게 맞는지 몰라서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꽃분 이모: 어머! 그렇네.

이걸 깜박하고 있었구나!     


현수: (걸어나가 짐을 들며) 같이 들어요. 오관장님.     


오관장: 고마워. 현수군.     


꽃분 이모: (짐을 받아들며) 곱게 해서 내려갈게.

그때까지 매점 좀 부탁해.      


오관장: 예. 이모님.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들 하세요.     


꽃분 이모: 고마워, 오관장.               



꽃분 이모는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그러자 도서관 매점에 있는 것과 똑같은 크기의 커다란 테이블이 뿅 하고 나타났다.

꽃분 이모급의 저승 사서는 팥알이 없어도 이렇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오관장이 가져온 짐은 꽃분 이모의 아일랜드 테이블을 한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짐은 비단 복주머니, 평평한 나무 접시, 실타래, 가위, 작은 무명의 신분패, 견과류가 담긴 부럼 깨기 주머니, 조그마한 나무망치였다.               



꽃분 이모: 이런 일은 서서 해야 해서 아일랜드 테이블로 했어. 현수야.     


현수: 이게 다 뭐에요? 이모.     


꽃분 이모: 아~ 현수는 처음 보겠구나.

이거는... 음! ‘저승 잡이’라고 할까?     


현수: 저승 잡이요?     


꽃분 이모: 돌잡이로 아이의 미래를 점치는 것처럼.

저승 가는 망자들은 저승에 가기 위해서 태초의 모습으로 되돌리게 도와주는 주머니야.

이걸 망자 한명 한명이 가지고 망각의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게 저승 사서들이 포장해서 준단다.

만월 도서관에서 망자들이 먹고 씻고 쉬고 나면, 망자 버스에 오를 때 하나씩 줄 거야.     


현수: 그런데 이것들... 새것도 있고 쓰던 것도 있네요?     


꽃분 이모: 그건 그럴 수밖에 없어. 

알려줄게.                    





#3     



꽃분 이모가 현수에게 설명해 준 저승 잡이는 이랬다.        


망자들이 망자 버스를 타고 저승으로 가면 가장 먼저 도착하게 되는 곳이 망각의 강이다.

그 강을 건너야 저승으로 향할 수 있다.

이승에서 지은 죄 등을 이때 모두 저승의 명부로 넘어간다.

망자의 심판은 저승사자의 일이 아니라 염라대왕의 몫이었다.

망자 버스를 타고 염라대왕을 만나는 데까지는 모두 5개의 관문이 있다.            



첫째 관문, 실타래 자르기.      

망자 버스가 망각의 강에 도착하면 망자들은 제일 먼저 복주머니에서 실타래와 가위를 꺼낸다. 이승과의 모든 연을 끊는다는 의미로 가위로 실타래를 한번 자른다.

그러면 버스에 실려있던 망자의 기억 박스가 엽전으로 바뀌면서 망자들의 실타래에 주렁주렁 꿰어지게 된다. 실타래를 잘라내야만 망각의 강을 건너는 배에 오를 수 있다.          



둘째 관문, 망각의 강을 건널 배에 오르기.     

배가 오면 망자들은 한 명씩 한 명씩 차례로 배에 오른다. 망자들이 모두 배에 올라앉고 나면? 

뱃사공이 복주머니에서 평평한 나무 접시, 견과류가 담긴 부럼 깨기 주머니, 조그마한 나무망치를 꺼내라고 한다.

망자들은 평평한 나무 접시 위에 견과류 주머니를 놓고 나무망치로 주머니를 내려친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 부스럼 같은 이승의 미련을 깨어 없애는 것이다.          



셋째 관문, ‘부럼’ 먹기.     

망각의 강을 건너는 동안 망자들은 부럼 주머니에 든 껍질이 깨진 호두, 땅콩, 은행을 먹는다. 

하나씩 하나씩 먹을 때마다 망자들은 일생 동안의 일을 망각하게 된다.

부스러기는 버리지 않는다. 

망각할 때마다 얼굴의 주름이 하나둘씩 없어지고 젊어져 온몸에 생기가 돌게 된다.

망각의 강을 건너고 나면 각자 가장 아름다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넷째 관문, 비단 복주머니 확인하기.     

망각의 강을 건너면 뱃사공은 망자들이 부럼 주머니에 든 걸 먹었는지 부스러기를 다 담았는지 확인한다. 그러고 나면 망자의 무명 신분패에 망자 이름, 생년월일, 주소가 새겨진다.

망자들은 신분패, 실타래에 꿴 엽전 꾸러미, 부럼 주머니만 비단 복주머니에 담아서 내린다.

뱃사공은 가위, 평평한 나무 접시, 조그마한 나무망치는 그대로 망각의 강을 거슬러 망자 버스를 걸쳐 다시 쓸 수 있도록 만월 도서관에 보낸다.

이걸 후대에는 저승 가는 노잣돈이라 했지만, 저승은 모두 무료다.           



다섯째 관문, 염라대왕의 심판장.     

신분패는 망자가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심판장에 들어갈 때 쓴다.

비단 복주머니 속에 기억으로 된 엽전은 심판 중에 망자의 죄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나쁜 짓으로 돈을 벌어 행복한 기억은 죄를 벌하는 데 쓰이고, 선한 일을 하며 보람을 느꼈던 기억은 죄를 사하는 데 쓰인다. 

부럼 주머니에 든 부스러기는 이승에 남은 망자의 사람들에게 안겨줄 복이 된다. 

조상 덕이나 조상 복이 있다는 건 바로 이 부스러기에서 기인한다.                    





#4     



현수: 아... 그래서.

비단 복주머니, 실타래, 작은 신분패, 부럼 주머니는 새것이고.

가위, 평평한 나무 접시, 조그마한 나무망치는 쓰던 것이군요.

재활용하는 이유가 있나요?     


꽃분 이모: 그래.

오래 쓴 물건에는 기억이 깃든단다. 이승과의 연을 끊어내고 망각하기 위한 도구를 기쁘게 쓸 수 있는 망자는 많지 않아. 그래서 무의식중에라도 먼저 거쳐 간 망자가 했던 행동의 기억이 담긴 걸 쓰게 하는 거지.     


현수: 아...      


꽃분 이모: 그래서 이걸 만들 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만든단다.

망자들의 진짜 마지막 길에 쓰이는 거니깐.     


현수: 네.

저도 같이 만들어도 돼요?     


꽃분 이모: 그럼, 예비 기보 사서님!

아! 그럼, 우리도 부럼 주머니에 든 호두, 땅콩, 은행을 하나씩 먹어야 한단다.

부정타지 않게~               

꽃분 이모는 오관장님이 준 짐꾸러미에서 망자들 것과는 다른 작은 주머니와 평평한 나무 접시, 조그마한 나무망치를 꺼냈다.

아마 저승 사서용으로 따로 준비된 것 같았다.               



꽃분 이모: 자~ 현수야. 

니꺼야.

얼른 깨보렴~     


현수: 네. 이모. (부럼 깨는 소리) 탕! 탕! 

이거 은근 재밌는걸요?     


꽃분 이모: 어어~

소꿉장난 같지?



예전에는 무덤에 관을 넣을 때 이렇게 작은 밥상을 넣었단다. 무덤의 주인이 저승에서 배곯지 말라고. 귀신 밥상이라고 불렀어. 원래는 그게 저승 잡이 역할을 했는데.

요즘은 그런 거 안 하니깐. 이 부럼 주머니는 그 대신이란다.     



현수: 아... 역사가 있는 거였군요.          


꽃분 이모: (부럼 깨는 소리) 탕! 탕! 현수야. 하나씩 음미하면서 먹어.

오늘의 부정한 감정을 잊고 망자를 위해 좋은 마음으로 복주머니를 꾸릴 수 있게.     


현수: 네 이모.               



현수는 부럼 주머니에 든 호두, 땅콩, 은행을 나무 접시에 꺼내 놓았다.

호두부터 입에 넣었다. 호두의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갑자기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조금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한입 씹었다.


이제는 보라색, 형광 노란색, 노오란 연두색 띠가 뱅글뱅글 돌면서 눈앞에 펼쳐졌다. 

6살 때 정종병에 머리를 정통으로 박았을 때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현수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원래 이런 것인가 싶어서 내색하지 않고 차례로 땅콩, 은행을 먹었다.

하지만 그 강도가 땅콩을 먹을 때는 처음에 두배, 은행을 먹었을 때는 처음에 세배만큼 반응이 컸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만큼 크게 뛰었고 뇌진탕에 걸렸을 때처럼 무지개색 띠가 계속 보이며 어지러웠다.               



꽃분 이모: 현수야~ 

너 부럼 먹다가 혀라도 깨물었어?

왜 그랭?     


현수: 이모. 

이 부럼 주머니가 저는 처음이라 그런가 효과가 좀 쎈가봐요.

좀 어지럽네요.

심장도 두근거리고요.     


꽃분 이모: 그래?

흠. 산사람에게 이걸 먹여본 적이 없으니 몰랐네.

그래도 별다른 맛이나 효과는 없을텐데...     


현수: 그래요?     


꽃분 이모: 니가 오늘 이런저런 일을 많아서... 안되겠다.

저쪽에 저승사자들이 만들어 놓은 테이블에 가서 쉬고 있으렴.

마침 에그 타르트도 남았고, 보리차도 있으니 같이 먹고.

응?     


현수: 네 이모.               

테이블로 향하는 현수에 다리가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겁다.

염라대왕님이 말했던 것처럼 뭔가 

지금도 꽃분 이모 치마폭에 쌓여서 아무 도움도 못 되는 어린아이가 된 듯했다.     

과호흡이 정해진 시간에 딱! 

발병하는 것도 아니니... 

지금의 몸 상태가 현수의 잘못은 아니다. 현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무력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약골이 따로 없네. 민현수!’


혼잣말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현수는 버팔로 가죽 소파에 털썩 앉아서 저승사자 4인방이 내어주었던 에그 타르트를 가득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달달하고 바삭한 것이 입안에 가득차니 씁쓸한 현수의 마음이 조금 누구러지는 것 같았다.     

현수의 하릴없는 시선이 망자 버스 쪽을 향했다.

저승사자들이 옮기는 박스마다 무언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현수의 눈이 급격하게 시리고 간지러워졌다.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고 보니 


손이... 

세상이...     

온통 피범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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