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ff the record Dec 14. 2024

22. 망자의 밥과 목욕 1

기억을 빌려주는 도서관

 



               

#1     



현수: 어!

피... 피가!!!         


      

현수는 너무 놀라 제대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혼잣말을 내뱉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엉거주춤 걸어 나와 사방을 살폈다.


피바다였다.     

피를 너무 흘려설까?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시야가 피로 물들었지만, 저승사자들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저승사자 넷이 

한복 두루마기 안쪽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서 들고 현수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마치 6살에 정종병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처럼 모든 상황이 현수에게는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갑자기 저승사자님들이 왜 저러시지?

이... 이모는?’          


     

현수가 꽃분 이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꽃분 이모는 저승사자의 형상을 하고 

수십 센티미터의 검은 손톱을 세운 채 죽일 듯한 기세로 현수에게 오고 있었다.               



‘내가 뭘 잘 못한 걸까?

나 오늘 여기서 죽는 걸까?’    


           

그때였다. 

양쪽으로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고개 숙여!”           


    

현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쉐에에엑!”        


       

날카로운 굉음이 계속 현수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꽃분 이모의 날카로운 손톱과 저승사자들의 검날이 현수 머리 위에 무언가를 베어낸 듯했다. 


              

꽃분 이모: 괜찮아?     


저승사자들: 괜찮으셔요?        

       

“쉐에에엑!”     


          

현수가 눈을 떴다.

피가 조금 가셨는지 앞이 보였다.  


             

“네 놈의 몸을...”  

   

“조용히 해! 이 불경한 것아!”      


         

종이처럼 찢긴 검은 입 모양이 

목소리를 내다가 저승사자 2호의 발에 짓이겨지며 재가 되어 사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저승사자 1호가 복주머니에서 손가락 마디만 한 작은 호리병을 꺼내어 현수 눈에 맑은 물을 떨궈줬다.

그러자 현수의 시야가 맑아졌다.    


           

1호 사자: 현수씨, 괜찮아요?     


현수: 네.

그... 그건 뭐였어요?  

   

3호: 악귀예요.

현수씨는 영이 맑은 사람인데, 

귀문이 뚫리면서 약해져 있을 때 악귀가 현수씨 몸을 차지하려고 달려든 것 같아요. 

     

4호 사자: 자자. 

나한테 팍 기대요.   

  

현수: 네?

(4호 품에 안긴 현수가 놀라며) 4호 사자님 무거우실 텐데...     


2호 사자: 어이구! 

4호는 힘 빼면 존재가 무의미한 사자에요~     


4호 사자: 맞습니다~

사서님 만월의 밤에 이 주변에는 가끔 악귀가 오기도 해요.

기억을 잃은 무기력한 망자들을 잡아먹고 힘을 얻으려고 해서요.

사서님 같은 사람의 몸을 차지하려고 오기도 해요. 

    

1호 사자: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칼을 차고 아침이 올 때까지 지키고 있답니다.     


현수: 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꽃분 이모: (울먹이며) 현수야.  

   

현수: 이모... (피 묻는 손을 보며)

이게 무슨 일이죠?     


꽃분 이모: (현수의 피 묻은 손과 얼굴을 닦아주며) 그게...

저승 신분패 때문에 눌러놨던 네 귀문이 갑자기 트인 모양이야.

그 억눌러놨던 게 피눈물로 흐른 거고.    

 

현수: 네?      


2호 사자: 아무래도 저희가 드린 것들 때문에 그런가 봐요.     


현수: 네에? 

커피 때문이라구요?     


1호 사자: 저희가 드린 건 저승에서 나고 자란 걸로 만든 것이거든요.

커피 원두가 저승 베이커리 제품이에요.     


          

현수는 머리가 띵했다. 

자신이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포네가 된 건가 싶었다.

하데스에게 납치당해서 저승의 석류를 먹고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녀처럼!     


저승의 것 혹은 저승사자가 준 음식을 먹으면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귀문이 트인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거 좀 부풀려진 이야기이다.     

사실 저승에서 난 음식을 먹고 영향을 받으려면?


그 당사자가 저승사자여야만 한다.     

저승에서 나고 자란 저승사자가 이승에 오래 머물면 기력을 잃게 된다.


기후에 영향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제주도에서는 잘 자라는 망고 같은 열대 과일이 서울 한복판의 아파트에선 잘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지구 온난화가 계속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서 저승 사서는 이승에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만월 버스를 통해서 저승 베이커리에서 공급받은 커피나 차 또는 디저트로 저승의 기운을 채우곤 했다.     


하지만 이런 효과는 현수 같은 산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게 맞다.

산 사람에게는 저승 베이커리의 것도 그저 맛있는 커피, 차, 디저트일 뿐이다.     


홍여사도 현수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매달 만월이 돌아오면, 망자 버스의 저승사자가 내려주던 향긋한 가제 저승 드립 커피와 저승 디저트를 먹으며 이들과 담소를 나눴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현수에게는 왜? 

저승사자와 같은 효과가 난 것일까?     




                

#2     



3호 사자: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 저승사자 팀이 나라를 팔아먹은 악귀를 쫓다가 일이 생긴 적이 있지?  

   

1호 사자: 맞아요. 일이 잘못되어서 악귀의 기억 속에 갇혔는데요. 

만월이 3번이나 지나도록 저승으로 못 돌아간 적이 있었다고 해요.   

  

4호 사자: 그래, 나도 선배한테 들은 적이 있어.

겨우 돌아와서 몇 달 만에 저승 음식을 먹고는 말이지!     


2호 사자: 저승사자의 막혔던 귀문이 뚫려서 눈, 코, 입, 귀까지 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았다고 했어요.     


꽃분 이모: 아니 무슨~ 

몸에 있는 구멍마다야~ 오바야, 오바!            


   

현수와 저승사자들은 

이상한 듯 눈을 꿈뻑이며 꽃분 이모를 쳐다봤다.

그걸 이모는 어떻게 알지?    


           

현수: 이모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3호 사서: 그러게요?      


꽃분 이모: 아니...

어휴~ 니네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안 돼?

그 저승사자가 말이지~

지금의 염라대왕이야!   

  

모두: 네에???     


꽃분 이모: 어휴~ 이게 저승사자마다 다르긴 한데~

그때 염 사수는 그... 음... 그쪽이 아니라.

피의 장 트러블이었어.

한동안 화장실에만 붙어 있었지. 

    

모두: 네??? 풉!        

   

    

갑자기 아까 보았던 근엄했던 염라대왕과 그가 염씨 저승사자이던 시절 피로 얼룩진 장 트러블이 연상 되면서 모두의 허를 찔렀다. 

이 정도의 현격한 이미지의 갭 차이에 웃음이 터지지 않을 이가 없었다. 

          

    

1호 사자: 큼큼~ 

어후, 웃다가 턱이 빠질뻔했네요.  

   

4호 사자: 오랜만에 크게 웃었네요.

음! 그런데 민현수 기보 사서님이?

염씨 저승... 아니아니! 

염라대왕님 때 사건처럼 피를 쏟아서 귀문이 열린 거면...    

 

3호 사자: 민 사서님, 

이제는 환등기가 보이는 거 아니에요?     


현수: 음... 어떤 게 보여야 하는 거예요?     


2호 사자: 사서님.

잠시만요!

(수레에 놓인 박스를 가져와서) 이 박스들 한번 봐주세요.

이게 망자들이 한 좋은 일, 크게 베푼 일, 소중한 기억을 모은 거거든요.          


     

현수는 박스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박스마다 정말 바움쿠헨을 세운 것 같은 환등기 표시가 보였다.     


          

현수: 박스마다 환등기 표시 같은 게 보여요.

흰색 박스 5개는 환등기 칸이 다 차 있고,

황금색 박스는 3개만 칸이 차 있어요.     


1호 사자: 사서님! 귀문이 열리셨네요!

이거 지청구 만합동에 사는 1960년생 백씨 망자 것이에요.   

  

2호 사자: 맞네요! 맞아.

이승에서 한 좋은 일이 5박스나 되고, 소중한 기억이 5박스가 되는 아주 워라밸처럼 밸런스가 잘 맞는 드문 망자예요.     


3호 사자: 백씨 망자는 아들 내외를 교통사고로 잃고 무기력하게 살다가 본인도 지병으로 죽었어요. 

공허에 사로잡혀서 소중한 기억을 2박스나 비어 있어요.    

  

현수: 그럼, 제가 사자님들과 똑같은 걸 보는 건가요?   

  

4호 사자: 어이구. 아니에요. 

저희는 가득 찼는지 비었는지 직접 박스를 들어봐야 알 수 있어요.

누구 것인지도 요요 망자 두루마리 리스트를 봐야 알 수 있어요.     


1호 사자: 민 사서님처럼 그렇게 쓱~ 

본다고 보이는 게 아니에요. 이게!               



현수는 그제야 저승사자들이 왜 자신에게 큰절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기보 사서의 능력이 거의 투시 망원경에 엑셀 프로그램이 깔린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현수가 있다면 저승사자들의 일 부담이 확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꽃분 이모: 현수야. 

망자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도 다 보이니?     


현수: 음...

(눈이 아픈 듯 비비며) 만합동과 백씨라는 글자는 잘 보이고요.

나머지는 뭔가 일부러 글자 위에 못 읽게 하려고 찍 하고 덧데어 휘갈긴 것처럼 되어 있어서 읽을 수가 없어요.     


꽃분 이모: 그래? 잠깐 매점 좀 갔다 오장~      




             

#3     



꽃분 이모는 엄청난 힘으로 현수를 공주님 들기로 안아 들고 날라서 도서관 지하 매점으로 내려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현수는 수치감에 사로잡힐 새도 없었다.

꽃분 이모는 현수를 매점 입구에 세워 놓았다.  


            

꽃분 이모: 현수야, 뭐가 보이니?     


현수: 이모...

음...        


       

처음 본 만월 밤의 도서관 매점은 가히 장관이었다. 망자와 전국에서 일을 도우러 온 저승사자로 꽉 차 있었다.     

현수가 망자를 보자 그 머리 위에 또 환등기 표시가 보였다.

그런데 이마에는 박스를 봤을 때와 달리 환등기 칸이 수십 개로 나눠져 있고 칸의 색도 달랐다.   


       

현수: 이모.

망자들의 환등기 칸 색이 흰색, 황금색 그리고 빨간색도 있네요?     


꽃분 이모: 그래?

환등기가 어느 정도로 선명하게 보이니?     


현수: 음~               



현수는 마치 시력 테스트를 하는 것처럼 

눈을 크게도 떴다가 가늘게도 떠보며 망자들을 유심히 보았다.    


           

현수: 빨간 부분만 어느 정도 차가 있는지 보여요.     


꽃분 이모: 그럼.

망자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는 보이니?     


현수: 아니요.

그건 박스랑 비슷해요.

뭔가 쓰여 있긴 한데 보지 못하도록 찍찍 휘갈겨 놨어요.     


꽃분 이모: 그렇구나...                   




 

#4     



꽃분 이모가 침묵하는 사이 현수는 매점 안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진풍경도 이런 진풍경이 없었다.     

고종황제 때의 근대와 현대가 오묘하게 섞인 모습이었다. 


매점 배식구에서는 

조선 시대의 1인 상 모양을 한 나무 쟁반을 든 망자로 가득했다.


그 쟁반에 망자들은 기본 찬, 식사, 국을 담았다.     

기본 찬은 각종 샐러드와 피클부터 배추김치, 총각김치, 동치미, 오징어채, 명란젓, 장조림, 동치미, 콩자반, 멸치볶음, 계란말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본 식사는 흰쌀밥, 보리밥, 잡곡밥. 그 외에 바게트, 흰 식빵, 모닝빵, 토르티야가 있고 각종 면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본 국은 된장국부터 소고기뭇국, 콩나물국, 미역국, 된장찌개, 김치찌개, 크림수프, 콩소메 수프, 어묵 국물이 나왔다.      

이렇게 기본 찬, 식사, 국을 고르면 메인 메뉴는 즉석에서 조리해 주는 듯했다.


매점 안에 있던 긴 테이블들은 각각 다양한 메뉴를 조리할 수 있는 철판 요리점 같았다.     

크게 동양식과 서양식의 양대 산맥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기본 찬과 식사만 고르면 원하는 메뉴를 즉석에서 무엇이든 조리해 주었다.          



임씨 망자: 사서님.

나는 스테이키에 우리 임자가 해주던 숙주나물을 같이 먹고 싶어요.     


저승 사서: 네네~ 망자님!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임씨 망자: 어이구~ 냄새부터 근사하구만.

내가 이 스테이키 칼질 한번 우리 임자라 못해보고 먹고 죽어서 이게 그렇게 한이 됩디다. 


              

망자가 앉은 자리 옆에는 이들이 먹은 쟁반이 천장에 닿을 듯 쌓여 있었다. 

저승 사서는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쟁반의 개수를 세고 차와 주류를 내주었다. 쌓인 쟁반의 숫자에 비해 망자의 배는 홀쭉했다.     


           

현수: 이모,

왜 저렇게 많이 먹는 거죠?     


꽃분 이모: 저승에 바로 가지 못해서 그래.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7일 되는 날 저승으로 가지 못하면 말이지.

그 이후부터 만월 도서관에 온 날까지 걸렸던 날 수대로 한 상씩 먹어야 저승으로 갈 수 있단다.  

   

현수: 그간 못 먹은 

저승 밥 수를 채우기 위해서 저렇게 먹는다는 거죠?     


꽃분 이모: 그렇기도 하고.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기도 해.

의식주라는 말 알지? 입고 먹고 사는 것. 

망자가 되면 입는 건 원하는 대로 어디든 가서 걸쳐 볼 수 있어.

꿈꾸던 집이 있으면 들어가서 지내볼 수도 있지.

그런데 먹는 건 안 돼. 

산 사람이 만든 건 맛볼 수 없거든.

그래서 여기 만월 도서관에 산 사람이던 시절에 좋아하던 것, 먹고 싶었지만 못 먹었던 것을 실컷 먹인단다. 먹다 보면 기억도 공허도 채워져.    

 

현수: (망자를 보며) 진짜 망자의 

환등기 칸이 미세하게 채워지는 게 보이네요.     


꽃분 이모: 오늘 밤에 다 못 채우면, 

다음 만월까지 만월 도서관 관사에서 지내며 먹고 씻고 자면서 채운단다~   

  

현수: 이렇게 들으면 숙제 같은데... 

매점 안 느낌이 기분 좋게 활기차고 좋아요.

어릴 적에 자훈이네 외할머니댁에서 보낸 여름방학이 생각나요.      


꽃분 이모: 비슷해~

현수, 너도 다음 만월까지 

망자들과 함께 여기서 저승 밥 좀 먹고 씻고 자자!     


현수: 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