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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the record Dec 15. 2024

23. 망자의 밥과 목욕 2

기억을 빌려주는 도서관

       



#1     



꽃분 이모: 현수야~ 

홍란 목욕탕도 가보자!     


현수: 이, 이모.

천천히. 으아아아!               



꽃분 이모는 천방지축 대형견이 주인을 끌고 가듯이 현수를 또 막무가내로 공주님 안기를 해서 홍란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홍란 목욕탕은 입구부터 망자들의 수다로 시끄러웠다. 

목욕탕은 정 가운데의 프론트가 자리해 있고 양쪽으로 남탕과 여탕으로 나뉘어 있다.

남탕과 여탕 문 양쪽에는 잡귀를 쫓기 위한 산초나무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꽃분 매점과 홍란 목욕탕은 같은 지하지만, 

낮에는 외부 계단을 통해 햇살이 안쪽까지 들어오는 쾌적한 공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홍란 목욕탕 입구와 그 주변 벽은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를 두르고 그 뒤를 조화 화초로 가득 장식했다. 또 그 앞쪽은 진짜 화초를 두어 이질감 없이 어우러져 온실에 들어온 듯 한 기분이 들게 했다.     

화초 키우는 걸 좋아하는 홍란 할매가 목욕탕을 늘 지켜야 해서 고안해 낸 인테리어 디자인이었다.



현수: 여긴 언제 봐도 예쁘네요.     


꽃분 이모: 홍란 할매가 원래 멋쟁이잖아~

잠깐만~               



꽃분 이모는 어딘가 신이 난 듯 

콧노래를 부르며 목욕탕 프론트에 놓인 탁상 종을 ‘땡’하고 눌렀다.

프론트 뒤의 커튼이 훅 열렸다.               



홍란 할매: 네~     


꽃분 이모: 할매~ 

현수 데리고 왔어요.     


홍란 할매: 어머! 현수야.

기보 사서를 할 수 있게 된 거야?     


꽃분 이모: 아휴~ 

할매 그것 때문에 왔어요.     


홍란 할매: 그래?

말이 길어지겠네. 일단 들어와.               



홍란 할매가 벽으로 보이는 프론트를 밀자, 

문처럼 활짝 열렸다.


현수는 꽃분 이모를 따라서 신발을 벗고 프론트 안으로 들어갔다. 홍란 할매가 열고 들어왔던 커튼을 지나자, 홍란 목욕탕의 찜질방 공간이 나왔다.                    





#2     



현수는 어릴 때부터 홍란 목욕탕에 다녔지만, 

이 공간은 처음이었다.


망자를 위한 찜질방 공간도 산 사람의 것과 똑같았다.     

양머리 수건을 머리에 하고 똑같은 반팔티에 반바지 차림의 망자들이 여기저기서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홍란 할매: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너 줄 게 있는데 깜박했다.

여기 잠깐만 있어.     


꽃분 이모: 할매두 참~               



홍란 할매는 다시 프론트의 커튼으로 들어갔다.

꽃분 이모는 홍란 할매가 뭘 할지 아는지 밝은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커튼을 젖히고 나온 홍란 할매는 핸드폰만 한 가죽 노트와 거기에 딱 맞는 펜을 현수에게 건넸다.



홍란 할매: 옜다! 받으렴.     


현수: 감사합니다.

홍란 할매.     


홍란 할매: 현수야.

이건 ‘만월 노트’란다. 

만월 노트로는 저승에 있는 사자들과 핸드폰처럼 대화도 하고 통화도 할 수 있어.

이 할미는 이걸로 망자들이 먹을 식혜를 늘 저승에서 주문한단다.

저승으로 돌아간 친구들과 이야기도 하고~

아! 아까 저승사자들 편에 전해준 에그 타르트도 ‘저승 베이커리’에서 주문한 거야~     


현수: 와~ 정말 핸드폰 같네요.      


꽃분 이모: 아까 저승사자들이 종이 두루마리 쓰는 것 봤지?

그게 이승의 태블릿 PC 같은 거거든.

만월 노트는 저승의 핸드폰이라고 생각하면 돼.

나는 주로 만월 밤에 쓸 저승의 디저트를 부탁해.     


현수: 아! 그렇구나.     


홍란 할매: 만월 밤이 끝나고 망자 버스를 타고 저승으로 향하는 망자들이 잘 가는 지~

그런 것도 망자 버스의 저승사자 1호, 2호, 3호, 4호에서 물어볼 수도 있지. 

현수 너 그 펜으로 노트 뒤 전화번호부에 ‘망자 버스-저승사자 1호’라고 한번 써보거라.

글자 다 쓰고 꾹 누르고 노트를 덮으면 신호가 갈 거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수는 

노트 맨 뒤에 있는 전화번호부 ‘ㅁ’ 장에 ‘망자 버스-저승사자 1호’를 썼다. 그리고 글자를 꾹 누르고 노트를 덮자 고운 가야금 소리로 통화연결음이 났다.               



1호 사자: 예~ 기보 사서님.     


현수: 1호 사자님. 전 줄 어떻게 아셨어요?     


1호 사자: 그 기보 사서님 만월 노트는 염라 대왕님이 마련해주신 거예요.

저희한테는 먼저 말씀해 주셔서~

벌써 기보 사서님 이름을 노트에 적어놨지요.

말 나온 김에 가제 드립 커피 좀 미리 주문하실래요?     

현수: 이 만월 노트로 할 수 있어요?     


1호 사자: 그~ 전화번호부 ‘ㅈ’에 ‘저승 베이커리’라고 쓰시고요.

글자를 두 번 톡톡 치시고 노트 맨 앞장에 원하시는 거 쓰시면 돼요.

값은 자동으로 스스슥 나타나요.     


현수: 그럼 값은 어떻게 지불해요?     


1호 사자: 노트에 같이 있는 펜 끝부분이 도장으로 되어 있어요.

값 나오면 거기 옆에 도장 찍는 칸에 도장 찍으시면 돼요.

염라 대왕님 앞으로 달아두는 것에요.     


현수: 네?      


1호 사자: 모든 저승 사서님은 안식년 중이시잖아요.

그래서 다 공짜여요. 저승의 복지가 꽤 좋아요. 기보 사서님!

또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해 주세요.

오늘은 만월이라 저는 망자들 짐 분류하러 또 가봐야 해서요.     


현수: 네.

감사합니다. 1호 사자님.

들어가세요.

네네.               



현수는 저승의 모든 것이 공짜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까 먹은 가제 드립 커피와 에그 타르트를 계속 공짜로 먹을 수 있다니! 

현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홍란 할매: 우리 현수 기분이 좋은가 보다.     


현수: 홍란 할매! 다 공짜래요.     


꽃분 이모: 내가 기보 사서가 엄청 대단한 거라고.

현수 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했잖니~     


현수: 이모 전 정말!

이런 정도인지는 몰랐어요.     


홍란 할매: 그래. 웃으니 보기 좋구나.

만월 노트는 그냥 노트처럼 필기할 때도 쓰렴.

다른 쓰는 방법은 차차 더 알려주마.      


현수: 네. 할매.     


홍란 할매: 현수야.

이제 슬슬 홍란 목욕탕의 망자들을 좀 한번 쭉 살펴보거라.                    





#3     



현수는 홍란 목욕탕의 망자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저 쉬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중 일부는 매점에서 보았던 1인 상을 받아서 먹고 있었다. 꽃분 매점 때처럼 그 옆에는 저승 사서가 같이 있었다.     

그런데 홍란 목욕탕의 망자가 먹은 쟁반의 개수가 꽃분 매점에서 봤던 것의 높이에 절반도 안 되었다.

의아해하는 현수를 보며 홍란 할매가 입을 열었다.               



홍란 할매: 여기 사람들은 상이 쌓인 높이가 좀 낮지?

꽃분 매점보다는 적게 먹어서들 그렇단다.     


현수: 네. 그렇네요.

할매, 어떤 차이가 있는 거예요?     


홍란 할매: 우리 저승 사서에게 망자는 딱 두 부류뿐이란다.

이승을 헤맨 지 얼마 안 된 망자.

공허에 빠져서 이승을 오래도록 헤매어 기억을 많이 잃은 망자. 

사실 말이지.

꽃분 매점에서 먹는 걸 먼저 선택한 망자는 후자란다.     


현수: 아! 그래서 그 수가....     


홍란 할매: 그렇지만. 

목욕탕에 먼저 온 망자들이라고 이승을 헤맨 무게가 가볍지는 않아.

그들은 이승에 얻은 분노, 억울함, 슬픔, 괴로움이 짙은 이들이지.

무의식중에라도 이승의 때를 빨리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이 홍란 목욕탕을 먼저 선택하게 된단다.     


현수: ... 씻고 나면 좀 나아지나요?     


홍란 할매: 그럼!

분노, 억울함, 슬픔, 괴로움 같은 나쁜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는? 

과거의 좋았던 기억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거든.

다 씻어내고 슬슬 기억이 차오르면서 허기가 지지.

그때 꽃분 매점에서 원하는 음식을 주문해서 여기서 먹으면 조금씩 기억이 돌아온단다.

묵은 감정이 씻겨야 입맛이 찾아오는 거지.     


꽃분 이모: 할매~ 

우리 먹으면서 해요.               



어느새 꽃분 이모가 식혜와 맥반석 달걀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났다.

홍란 할매는 그런 이모를 흐뭇하게 보며 방석을 내어주곤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수는 핸드폰에 방금 들은 내용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귀문이 트여서인지 핸드폰 화면이 전과 달리 완전히 까만 먹통이다.

현수는 만월 노트를 꺼내서 이렇게 메모했다.          



* 꽃분 매점- 기억 잃고 공허로 이승을 오래 헤맨 망자. 많이 먹음.

* 홍란 목욕탕- 이승에 나쁜 감정이 큰 망자. 적게 먹음.          



그러는 사이 꽃분 이모가 

현수의 환등기 이야기를 홍란 할매에게 꺼냈다.               



꽃분 이모: 할매.

현수가 환등기가 보이기는 하는데요.

영~ 시원찮아요.     


홍란 할매: 어쩌다가?     


꽃분 이모: 아무래도 그... 

저승 신분패로 현수 능력을 너무 오래 눌러놔서 그런가 봐요.

그래서인지 현수가 아까 가제 드립 커피랑 할매가 준 저승표 에그 타르트 먹고요. 

피 칠갑을 했었어요.     


홍란 할매: 어이구!

염라처럼 피똥...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헙!     


꽃분 이모: 할매! 비밀이라니깐~

현수는 그쪽이 아니구요. 피눈물이 났어요.

덕분에 피의 계약은 안 해도 돼서 좋지만요.     


홍란 할매: 흠~ 미안~

피눈물이라... 놀랬겠구나. 

우리 현수.     


현수: 이제 괜찮아요.     


홍란 할매: 현수야, 그럼 지금 이곳 망자의 환등기는 어떻게 보이니?     


현수: 음...

하얀, 황금 부분이 있는 건 알겠는데 정확한 수치는 안 보이고요.

빨간 부분만 제대로 보여요. 이건 뭐에요?     


홍란 할매: 그건.

아까 말했던 망자들의 나쁜 감정이란다.

꽃분 매점에 비해서 여기 망자들은 그 수치가 좀 낮지 않니?     


현수: 어! 맞아요.

확실히 더 낮아요.     


홍란 할매: 아마 씻기 전에 탈의실에 있던 망자들의 환등기를 봤다면 놀랐을 거다.

환등기가 온통 붉거든.     


현수: 네...     

꽃분 이모: 어쨌든~

배불리 먹고 때도 박박 밀고 잘 자면.

된단다. 이 만월 도서관에서!

빨간 부분이 점점 없어지고 좋은 기억들로만 가득차게 돼.


현수: 그러려면 얼마나 걸릴나요?     


꽃분 이모: 그건...               



현수는 죽어서까지 이승의 나쁜 감정을 짊어지고 있는 망자들의 속마음을 본 듯해서 내심 안쓰러웠다.

죽음은 역시 끝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홍란 할매: 저승 사서 하기 나름이란다.     


현수: 네?      


홍란 할매: 저승 사서가 그 망자의 환등기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단다. 우리가 전체를 다 볼 수는 없거든. 

하지만 보통 만월을 두어번 보내고 나면 망자들은 다들 저승으로 가는 망자 버스에 오를 수 있을 만큼 좋아진단다.     


현수: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홍란 할매, 환등기는 그냥 보면 보이는 게 아니에요?

집중해서 보면 뭔가 달라요?     


홍란 할매: 그게 무슨 소리니?     


꽃분 이모: 홍란 할매.

현수는 망자를 보면 망자의 환등기가 그냥 다 보인데요.

흰색, 황금색, 빨간색 부분 다요.     


홍란 할매: 뭐라구?

아니 어떻게?                    





#4     



모든 저승 사서는 망자의 환등기에 나타난 좋은 기억, 소중한 기억, 나쁜 감정이 보인다. 환등기에 필름 슬라이드 형태로 기억이 채워져 있어서 수치처럼 보인다.          


좋은 기억 = 흰색 슬라이드

소중한 기억 = 황금색 슬라이드     

빨간색은 이 두 슬라이드를 나쁜 감정이 잠식했을 때 보이는 데 그 감정이 해소되면 빨간색은 사라진다.          

저승 사서는 망자의 상태창을 

하루에 10번 밖에 볼 수 없다. 환등기를 보는 데 체력이 너무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승 사서는 더 많이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관리자급인 꽃분 이모, 홍란 할매, 오 관장, 덕팔 삼촌, 춘봉 아재는 예외적으로 13번까지 볼 수 있었다. 염사서는 아직 평 저승 사서지만 11번까지 볼 수 있는 인재였다.     

그래서 망자가 만월 도서관에 오는 만월에는 전국에서 저승 사서가 차출되어 도왔던 것이다. 


만월 버스에 동승하는 저승 사서 외에도 

꽃분 매점과 홍란 목욕탕에서 일할 저승 사서는 만월 날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망자들의 상태창을 최대한 실시간으로 확인해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저승 사서는 꽃분 매점과 테이블에서 요리하며 실시간으로 망자들의 상태창을 체크해서 음식을 해내었다. 

홍란 목욕탕의 저승 사서는 망자가 씻은 후부터 식사를 체크하며 살폈다.      

망자가 저승에 보낼 만큼 회복되었는지, 혹은 만월 도서관 관사에 머물며 장기 관리를 받아야 하는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월의 밤이 끝나고 망자를 다시 망자 버스에 탑승시킬 때도 환등기를 체크한다. 심장 박동기처럼 실시간으로 변하는 망자의 환등기를 10번 밖에 체크할 수 없기에... 

저승사서들은 망자 옆에 딱 붙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제약 없이 망자의 환등기를 볼 수 있는 현수의 능력은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다.

민현수는 갑자기 판타지 소설에 빙의한 먼치킨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기쁘지만 무섭고 또 혼란스러웠다.                    





#5     



꽃분 이모: 현수야.

어깨 쫙 펴고 턱도 치켜들어.

니 능력이란다.     


홍란 할매: 너는 특별한 아이란다. 그래! 

만월 도서관 식구들이 왜 너를 그렇게 챙기는지 아니?     


현수: 음.

저희 할머니 때문에요?     


홍란 할매: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구나.               

홍란 할매는 현수를 찜질방이나 목욕탕에 가면 으레 있는 커다란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현수는 영문을 몰랐다.                


홍란 할매: 자. 

네 환등기를 한번 보렴. 현수야.     


현수: 헉!                




‘내 환등기가 왜 깨져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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