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묘 猫 인연 연 緣
고양이가 까끌까끌한 혀로 내 손을 처음 핥아줬을 땐 그랬다.
강아지 밖에 키워 본 적이 없는 내겐 그랬다.
까끌까끌한 혀라니 ..
정을 붙여보려고 쓰다듬었던 고양이가 내던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땐 그랬다.
강아지 밖에 키워 본 적이 없는 내겐 그랬다.
으르렁 거리다니 .. 쓰다듬어 주는데 ..
고등학생 때 내가 처음 만난 고양이는 그랬다.
동생이 울며 불며 고양이를 안고 집에 들어와 버렸다.
몰래 먹이를 주며 이뻐하던 길고양이가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단다. 분명 그랬는데 똑같이 생긴 길고양이를 만났다며 데리고 왔다.
솔직히 동생이 데려온 길고양이는 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삐뚤어진 콧수염 같은 얼굴 무늬 때문에 심술 맞아 보였다. '못생겼다'라는 첫인상과 고등학교 시절 접한 고양이에 대한 느낌 때문에, 노발대발하면서 안된다는 부모님과 한편에 설 뻔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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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이라고 했던가?
그 말처럼 어른이 되어 나는 이 고양이와 인연을 맺기로 마음먹었다.
동생이 데려온 고양이는 예전에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처럼 꼬리가 자라다만 흠 있는 녀석이었다.
(어미 배에서 충분히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개나 고양이 새끼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이 길고양이의 꼬리를 보자 왠지 전에 키우던 강아지가 생각나서 동생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는 사실 부모님이 아시는 분께 얻어 왔기도 하고 말갛게 웃으며 안기던 녀석에게 푹 빠져서 꼬리가 짧은 흠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고양이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 녀석의 자라다만 꼬리 때문에 강아지와 맺었던 좋은 인연처럼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게 '묘연'이지 않을까 싶다.
동생에겐
죽은 길고양이의 환생 같고
내게는
몇 년을 동고동락하던 강아지의 닮은꼴 같아서 말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고양이의 모든 행동이 다르게 보였다.
이제는 우리 집 고양이가 까끌까끌한 혀로 내 손을 핥아줄 때면 이렇게 생각한다.
강아지가 핥아줄 때면 침이 묻어서 싫을 때도 있었다.
까끌까끌하고 건조한 고양이의 핥음은 침이 묻지 않아서 이제 좋다.
내가 쓰다듬어 줬는데 으르렁 거리지 않으면 이제 살짝 섭섭하다.
그래서 으르렁으르렁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쓰다듬게 된다.
으르렁 이 나를 경계해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 기분이 좋아서 그런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도 강아지만큼 정들지 않겠지 했던 내게 우리 고양이는 고양이 답게 정드는 법이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슬쩍 와서 다리를 쓱 비비고 지나가고
눈이 마주치면 발라당 뒤집어지고
책상 위에 올라와 지긋이 나를 쳐다보면서 말이다.
그렇게 무던히 있는 듯 없는 듯 불쑥불쑥 나타나 따스한 눈빛을 보내주며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고양이 뽀뽀 알레르기가 있다.
우리 고양이가 자기 얼굴을 내 얼굴에 비비거나 코로 콩콩거리며 내 뺨에 뽀뽀를 해주고 나면
금세 내 얼굴은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십여분쯤 주체할 수 없는 가려움에 시달린다.
그럴 때면 얼른 얼굴을 씻으러 화장실로 뛰어가게 되고 그런 나를 이 녀석은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리곤 한다.
세수를 마치고 나오면 녀석과 눈이 마주친다.
알레르기라는 걸 알 길이 없는 고양이를 위해 한바탕 알레르기를 치르고 나면 나는
엄마가 아기에게 뽀뽀하는 것처럼 고양이 이마에 늘 입을 맞춘다. 세수를 하느라 화장실에 간 나를 기다려주는게 예뻐서 말이다.
이상하게 고양이 이마에는 뽀뽀를 해도 알레르기가 생기지 않았다.
나름의 묘연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 이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말처럼
나름의 방식으로 함께 동행할 수 있어서 좋다.
걷다 보면 종종 길고양이들을 만나게 된다.
저 아이는 누구의 묘연이 되려나 하는 생각이 볼 때마다 든다.
약간 흠이 있는 아이들도 있다.
그럴 때면 오히려 그게 인연이 되어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본다.
고양이에게는 알레르기마저도 극복하게 만드는 따스함이 있다.
강아지처럼 살갑게 굴지는 못하지만,
고양이는 늘 주변을 맴돈다.
살가운 이도 좋지만
늘 주변에 있어주는 이도 좋지 않은가?
그런 따스함을
'묘연'을 맺어 많은 이들이 경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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