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좋다.” 10번 외친 하루, 부녀간의 데이트

행복했던 아빠와의 남대문 나들이

by 깨알쟁이

며칠 전 아빠가 남대문에 시계를 고치러 간다고 하시길래 누구랑 가시냐 여쭤보니 혼자 가신다고 하셨다. 잘 됐다. 나의 퇴사 버킷리스트 중 첫 번째가 ‘가족과 시간 많이 보내기’였는데 그중 가장 하고 싶던 아빠와 단둘이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다!


아빠가 우선 우리 동네로 와서 같이 버스를 타고 남대문으로 향했다. 같이 버스 타고 서울 나가본 건 은행 1차 면접 전전날인 2013년 6월 이후 12년 만인 것 같은데..! 감회가 새롭고 이런 날이 결혼 후에도 온다는 사실이 나는 참 감사하고 기뻤다.


아빠가 단골집으로 삼고 시계를 수리하고 교체하고 중고로 나눔 하고 중고로 구입하는 가게가 있는데, 엄마의 심부름 3개와 아빠 시계 교체 건으로 방문하신다고 했다. 아빠는 여느 때처럼 친근한 말투로 사장님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눴고, 기억하고 있던 사장님의 존함을 언급하시며 시계들에 대한 대화를 시작했다.


이런 걸 보면 나의 성격 7할 이상은 아빠를 닮은 것 같다. 처음 본 사람들과도 잘 이야기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든다. 때로는 그 사람들이 나랑 1시간 남짓 대화했는데 너무 재밌었다며 나 가는 데까지 데려다준 적도 몇 번 있을 정도로 내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긴 있나 보구나.. 했는데 다 아빠한테서 온 거였다.


아빠는 시계 수리를 모두 마치고 어제 차고 간 시계 대신 새 시계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하게 되었다.

다니엘 웰링턴 가죽 시계.

브랜드도 몰랐다가 내가 ”이 브랜드 예전에 아빠가 목걸이 사준 브랜드예요. 시계도 나름 많이 차요.” 했더니 기억이 나셨는지 큰 관심을 보이다 구매 결정을 마치셨다. 덩달아 마침 애플워치를 안 차고 간 나에게도 커플 시계를 선사하셨다. 이게 웬 횡재!!



아마도 아빠는 시계도 시계지만 나와 함께 한 그 순간을 추억하고 싶어서 아빠도 사고 나에게도 같은 브랜드의 시계를 사주신 게 아닐까 싶다. 나도 고민하던 다른 시계가 하나 있었지만 같은 이유에서 더 이 시계가 마음에 끌려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부원면옥이라는 평양냉면집에 가서 심심한 냉면으로 한 끼를 해결했다. 어릴 적 교회 끝나고 을지로 부근에 있는 몇 개의 냉면집을 외가 친척 어른들과 함께 먹던 기억이 있는데, 오랜만에 강북으로 올라와 아빠 모시고 냉면을 먹으니 그때가 생각나서 또 감사했다.

우리가 여전히 이렇게 가까이 지낼 수 있고 남부러운 부녀지간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을 거다. 지금 이 시대, 이 나이가 되어보니 더 뼈저리게 느끼는 마음이다.


식사를 마친 후 남대문 투어를 조금 더 하고 우리는 사진을 찍기 위해 덕수궁 부근으로 향했다. 내가 종종 하는 스터디 장소가 여기 건물이며 (HFK 오아시스 덕수궁을 깨알같이 소개했다) 나는 주말에 오면 이곳에 주차한다며 아빠에게 tmi를 전하며 포토 시그니처에 입성했다.



머리띠도 고르고 선글라스도 고르며 아빠와 짧지만 재미있게 사진을 남겼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우리 아빠를 보고 귀엽다고 했는데 지금도 너무 귀여운 것 같다ㅋㅋㅋㅋ 진짜 우리 아빠는 세상 최고의 아빠다!!



아빠와 장장 6시간 동안 서울 데이트를 하며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있을 때 잘하자’를 한 걸음 실천한 기분이랄까?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경제활동인구에 속해야 하는 현실도 맞지만 나에겐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일에 매진해 내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소홀히 하면 분명 나중에 크게 후회할 텐데 나는 그 후회의 시간을 지금의 때에서 조금씩 줄여나갈 거다. 가족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의 일도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변화시킬 의향이 있는 나로서 어제의 아빠와의 데이트는 큰 의미로 다가온 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퇴사한다고 했을 때부터 사실 걱정보다는 간섭에 가까운 말들을 던져왔다.


“다음 일자리는 구했어? 어디 구하고 나가야지. 지금이 어느 땐데.”

“아무리 힘들어도 현실을 생각해야죠. 그냥 그렇게 나가면 어떻게 해요?”

“제 주변에서도 묻더라고요. 이제 그래서 어디 들어가고 뭐 하실 거냐고요.”

“낙오자가 되고 싶나요? 지금 그렇게 아무 계획 없이 퇴사하면 세상에서 금방 낙오자로 낙인 돼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너무 불쾌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흘려듣고 속으로는 ‘알아서 할 텐데 왜 저래..’를 백번 천 번 외쳤다.



이 시간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느끼고 있고 또 느낄 것이라고 확신한다. 세상 살면서 뭐가 가장 중요한지, 내가 가장 에너지를 쏟아야 할 부분은 무엇이고 나로부터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면 좋을지. 충분히 고민하고 회복하는 시간이다.


아빠와 시간을 보낸 어제도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자고.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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