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번아웃의 서막부터 자발적 퇴사까지, 이제야 풀어보는 이야기.

by 깨알쟁이

나는 인정욕구가 높은 사람이다. 그게 수치로 나타나든 누군가의 말과 행동으로 전해듣든 '내가 지금 잘 하고 있구나.' 또는 '내가 일을 잘 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느낌이 들면 너무 뿌듯하고 기뻐서 그 칭찬을 더 받고 싶어 일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어떤 모습으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늘 고민하며 살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나에게 작년은 사실 굉장히 힘든 한 해였다. 비즈니스가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일을 할 때 어디에도 내 편이 없는 기분이였고 일이 터질 때마다 희미하게나마 보이던 해결책들이 점점 뿌옇게 블러처리되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일이 안 되는 것을 다 내 책임으로 돌리지 말라고 모두들 나를 말리고 위로하며 격려했지만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았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이미 광대를 통해 턱에서 목으로 눈물은 흐르고 있었다. 단순하게 매출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볼텐데 모든게 얽히고 설켜 내 힘으로는 도저히 풀기 어려워 보였다. 다들 그렇게들 바라봤다. '너가 힘들겠네..' '네 자리가 지금 쉬운 자리는 아니긴 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되겠지. 잘 풀리겠지.


늘 오뚜기 정신으로 잘 이겨내왔던 나에게도 '이런 게 번아웃인가?' 라는 순간이 턱 하니 찾아왔다.

아마도 결혼 전 4월이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인생에서 중요한 소식을 전하고 초대하며 축하받는 시기라 좋은 감정이 더 많이 들어왔던 터라, 종종 떨어진 눈물도 복에 겨운 감정이라 생각하고 무시하고 방치했다. 그저 결혼 전이라 싱숭생숭한 감정이 많이 들 시기라고 생각했다. 결혼식 4일 전 Monthly sales-marketing meeting에서는 지난 달 뚝 떨어진 sales-out 그래프가 포함된 장표를 발표하는데 그 순간 어떤 지적과 공격이 들어올지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프로답지 못하게) 울먹거리며 발표를 시작했고 결국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으며 엉터리같은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메리지블루의 일종이며 신혼여행 다녀오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긴 휴가 끝에 다시 출근하는 6월부터는 적어도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고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라, 왜 나 아직도 힘들지?
바라고 바라던 유럽까지 다녀 왔잖아?



사실 생각해보면 난 늘 타인이 나에게 쏟아낼 질문(일어나지 않은 것이 적어도 80%는 되는 것 같지만..)을 미리 머릿 속에서 떠올려보고 예상 답변을 굴려보고 남이 나를 지적하기 전에 내가 나 스스로를 먼저 괴롭히는 변태같은 습관이 있다. 칭찬해줘야 마땅할 일인데도 늘 깎아내리고 시작한다. 스스로에게 비아냥대고 비꼬기까지 하는 안 좋은 습관이 사실 나에게는 있었다.



예를 들면, 지난 달 매출이 200% 이상 신장했을 때에도

'그래 잘 했네. 근데 이거 어차피 다 네가 한 거 아니잖아. 너 혼자서 만든거 아니잖아.'

이건 역으로 생각해보면 못 했을 때도 내가 혼자 못 한 게 아니라는 말인데 말이다.


상사가 "과장님은 정리를 참 잘해요. 사람들이랑도 참 잘 지내시고요. 부드러운 화법과 경청하는거 그거 쉬운거 아니에요. 그걸로 지금 다 사람들을 본인 편으로 만든 거잖아요." 라고 대단한 칭찬을 해주셨을 때에도 가끔은 또 이렇게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정리는 잘 하는데 숫자는 잘 못 보는 마케터인데 나 어떻게 해?'

'경청만 하지 사실 알맹이는 없는 사람인걸...'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즐거운 신혼여행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고 나니 어려운 과제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지만 계속 나는 다짐했다. '나 쉬고 왔잖아. 나 이제 결혼도 했고 책임감을 가져야 돼. 많이 배려해주셨으니까 열심히 해보자. 힘들어도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올거야 언젠가는.'

꾸역꾸역 버티다보니 괜찮아졌다. 여전히 바빴지만 청사진을 그릴 수 있었기에 버틸만 했고, 상사도 주변 동료들과 어김없이 업무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다.


8월이 되니 총판을 바꾸는 작업을 하며 비로소 내가 일하면서 가장 뿌듯함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순간을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이나 글로 소개하고 설득하는 것이 마냥 즐거웠던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우리 회사 제품을 소개하고 교육하고 QnA를 재미있게 설명하고 '나를 믿어봐. 이거 어려운 제품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우리 함께 하면 이거 거뜬히 000까지 팔 수 있어! 같이 잘 해보자. 걱정하지 마.'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내부 영업, 마케터의 일이라고 배운 나는 물심양면으로 외부 영업조직과 끈끈함을 이어가며 드디어 나와 함께할 사람들을 만난 기분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영업과 직결된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 필요하다고 요청하고 건의하고 제안해주는 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 때를 위해 이제까지 버텨온 거구나! 이 사람들이랑 잘 해보려고 이제까지 연마해 온건가? 그동안 수고했다. 이제부터 정말 잘 해볼 수 있겠어!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지금 매출의 2배는 거뜬하지!'



분명 나는 확신이 있었는데.. 저렇게 생각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거래처 내부 사정 상 영업조직 3명 전원이 모두 일을 같이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그들로부터 미안했다는 연락을 받곤 했지만 당시 나로서는 정말 답답한 마음뿐이였다. 나는 본사 소속 마케터고 우리 회사에는 영업조직이 아예 없고.. 그럼 물건은 어떻게 팔지? 누가 팔아? 왜 그만둬? 이것도 또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맡으면 다 왜 이러지?'

'이제는 다 내 책임이라고 할텐데 다음 계획은 어떻게 짜면 좋지?'

'나 도저히 이제 감당이 안 돼.'

'내가 이 회사랑 안 맞는건가?'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나한테 정말 왜 이래 다들?'




번아웃은 전부터 쭉 진행되어 왔지만 점점 더 심해 속으로 들어가게 된 건 명백히 이 시기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정말 잘 해보려고 people management, marketing strategy.. 균형있게 쌓아가며 무너졌던 sales out을 다함께 세워보려고 했는데, 몇 곳에 금이 가 있던 유리 거울이 쾅 떨어져 와장창 깨져버린 형국이였다.

이 때부터 나는 회사에서 반항직원, 관찰직원이 된 느낌이였다. weekly update에 가도 할 말도 없고 내가 어차피 무슨 계획을 짜고 발표한다 한들 다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뿐이였다. 지난 봄 본사 Budget을 -300% 가까이 떨궜을 번아웃 시작 지점부터 가을에 이르는 시점까지.. 어차피 내가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설득한다 한들 그게 되겠어? 라는 부정적인 마음들로 가득찼다.

그게 상사 눈에도 빤히 보였다. 당연히 그랬을거다. 회의 때마다 말할거리도 만들지 않고 텅 빈 노트와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눈물 젖은 휴지만 가득 들고 2시간 만에 얼굴이 벌개져서 나갔으니..

당시 상사는 나에게 한 번은 '그건 니 탓이 아니다. 왜 이렇게 그거까지 다 네 책임으로 가지려고 하냐.' 라고 했다가도 또 다음에는 '너는 주인의식이 부족하다.' 라고 하며 어쩔 줄을 몰라하셨던 것 같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야속하기만 했다. 나는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고 큰 계획이든 작은 계획이든 세우기가 두려웠다. 내 의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저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이제 못 하겠어요.
회사에게도 동료들에게도 민폐끼치는 것 같아 미안하고
제 스스로에게도 너무 미안해요.
진짜 이제 그만 미안하고 싶어요..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면서 상사로부터 팀 또는 직무를 바꿔보겠냐는 진위를 판가름하기 어려운 제안을 받았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제안을 하셨을까 싶다가도 이제까지 쌓아온 커리어와 쌓아갈 커리어를 생각했을 때 지금 현상유지가 차라리 낫겠다 싶어 거절을 했다. 그리고 그 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일부 업무에서 제외되었고 이로 인해 나는 더 스스로 정체성과 존재감을 찾기 어려운 시간을 지내왔다. 그러다 상사에게 깊은 고민 끝에 이렇게 말했다.


"__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힘들어했었고 극복해보려고도 이겨내보려고도 했는데 정말 잘 안 돼요. 근데 이게 회사에도 민페고 동료들에게도 미안한 거잖아요. 저 스스로에게도 너무 미안해요. 저 이제 못 하겠어요. 죄송한데 저 이제 그만 미안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퇴사한 지 어언 3개월이 되었다. '일단 쉬자. 일단 벗어나자. 일단 내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노력하자.'라는 생각으로 나왔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 구직 활동도 어렴풋이 하고 있는 요즘인데, 합격 여부와 무관하게 불안한 마음은 아직도 기저에 늘 깔려 있다.


회사라는 곳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끝없이 물음표 천지다.


'나 진짜 회사라는 곳에 다시 소속되고 싶은 게 맞을까?'

'내가 구직활동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경제적인거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당당히 요구해야할 것에 또 목소리 내지 못하고, 바보같이 당하던 과거의 내 모습이 반복되지는 않을까?'

'나중에 임신하게 되고 소식을 알리면 권고사직 당하면 어떻게 해?'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느꼈는데, 왜 사람이 두려운걸까?'

'알고보면 나는 사람들과 일하기 어려운 성격인 건 아닐까?'

'꼭 회사에 다시 돌아 가야할까?'

'내가 회사라는 곳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의 형태는 무엇일까?'

'지금 일을 꼭 해야 할까?'




일로부터 얻었던 성취감, 보람이 유독 컸고

그래서 일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워했던 사람이었는데

과연 그게 회복은 되고 있는 걸까? 아직도 회복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회복이 될까?

하염없이 번아웃, 갭이어, 리프레쉬에 대한 책을 읽고 명상을 해야 할까?


꼭 9to6로 어딘가에 매일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며 4대 보험 되는 직장에 소속되어야 성공한 여성상일까? 다른 길은 없을까? 다시 번아웃을 느끼지 않고 잘 버틸 자신이 있는걸까?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다보면 내 길이 있을 거라고 하는데 진짜 있긴 있는걸까?



머리부터 가슴까지 물음표로 가득찬 나의 마음, 묵혀뒀던 답답함과 설움을 터뜨렸다.


여전히 두렵고 불안하고 그렇지만 초라해지고 싶지 않은 내가 쓴

번아웃과 자발적 퇴사의 긴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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