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는 여자'
요즘처럼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해지면 자연스레 가디건을 찾게 된다. 사실 정확한 표기는 '가디건'이 아니라 '카디건(cardigan)'이다.
이 이름은 19세기 대영제국군 장교였던 카디건 백작(Earl of Cardigan)에서 비롯되었다. 카디건 백작은 오만하고 고집이 센 성격이었으며, 부하의 죽음조차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대중에게 알려질 리 없었다. 대중들은 그를 국가에 충성을 바친 영웅, 스포츠를 즐기는 젠틀맨, 패션을 선도한 스타일 아이콘으로 기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러한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카디건'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크림 전쟁(1853-1856) 중 그가 군복 위에 보온을 위해 손뜨개로 만든 앞여밈 니트 조끼나 스웨터를 걸쳤는데, 이 옷이 그의 이름을 따 ‘카디건’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전쟁 이전에도 비슷한 형태의 니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카디건 백작이라는 인물의 군사적 권위, 귀족적 이미지, 시대적 인기가 더해지며 이 옷은 단순한 군사 실용복을 넘어 새로운 디자인 감각과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갖춘 귀족적 니트웨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카디건은 처음엔 전장에서 보온을 위한 군사 니트웨어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카디건은 전장을 벗어나 스포츠와 레저웨어로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당시 유럽 사회는 근대적인 스포츠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던 시기였다. 낚시, 승마, 크리켓, 골프 등 움직임이 많은 활동 속에서 신축성이 좋고 보온성이 뛰어난 니트는 운동복으로 제격이었다. 자연스럽게 카디건 역시 남성의 스포츠웨어이자 레저웨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1920-30년대 윈저 공(Prince of Wales / 후의 Edward VIII)이 골프 등을 즐기며 카디건과 패턴 니트를 세련되게 매치한 모습은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셔츠 위에 카디건을 걸친 모습, 여유롭고 활동적인 실루엣, 귀족적이지만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그의 스타일은 당시 남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중반 윈저 공이 미국을 방문하자, 그의 니트웨어 스타일은 매스미디어를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전쟁의 기억을 품고 있던 니트가 귀족의 레저웨어를 거쳐 도시 남성의 일상복으로 변모한 순간이었다. 한때는 전장의 군복이었던 카디건이 이제는 일상을 살아가는 남성들의 옷이 된 것이다.
그러나 카디건의 진짜 전환점은 그 이후 니트 소재가 여성복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찾아왔다. 20세기 초,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확대되고 실용성과 편안함에 대한 요구가 커진 시기 코코 샤넬(Coco Chanel)은 당시 남성 스포츠웨어나 속옷에 사용되던 저지(jersey)를 여성복에 과감히 도입했다. 부드럽고 유연한 저지 소재는 여성들로 하여금 허리를 조이고 몸을 구속하는 코르셋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즉 이는 단순한 옷의 변화가 아니라 여성의 몸을 해방시키는 혁명적인 행위였다.
당연히 가디건 역시 이 변화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부드러운 저지 소재는 몸의 곡선을 억지로 재단하지 않았고, 카디건은 여성에게 '숨 쉴 수 있는 옷', '움직일 수 있는 옷' 중 하나가 되었다.
군대의 옷이었고, 귀족의 레저였으며, 남성의 일상복이었고, 여성 해방의 도구였으며, 지식인의 중성적 복장이기도 했던 카디건. 카디건처럼 옷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옷은 시대의 몸 위에서, 입는 사람의 몸 위에서 언제나 새롭게 다시 쓰인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입는 카디건 역시 그 긴 역사왕 해석의 층위를 조용히 품은 채 그저 우리의 하루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