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는 여자‘
옷에 대한 이야기를 적다 보면 유난히도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등장하는 요소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슈트(suit)’다. 본격적으로 슈트가 특별한 의미 체계를 갖기 시작한 시점은 19세기 초 댄디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보 브럼멜(Beau Brummel)의 등장 이후라고 볼 수 있다. 브럼멜은 단정하고 몸에 잘 맞는 일종의 제복적 실루엣을 지닌 옷을 즐겨 입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남성 복식 문화를 확립했다. 그가 추구한 스타일은 멋스럽고 세련되면서도 과장되지 않았고, 진지하면서도 절제되어 있으며, 우아한 품격을 지녔다. 그는 영국 상류사회의 남성복 스타일을 화려하고 장식적인 방향에서 벗어나 단정하고 간결한 실루엣으로 전환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브럼멜 등장 이전의 남성복이 대체로 장식적이고 색채가 강하며 과장된 스타일이었던 점을 떠올리면, 이는 확실히 획기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본래 18세기 영국 남성복은 군복(military uniform)과 승마복(riding caot)의 구조와 실루엣을 기반으로 한 실용적이고 단정한 형태였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와 엘리트 부르주아 계층이 정착하면서 이러한 형태는 그들의 이상에 부합하도록 표준화되었고, 슈트는 곧 서구 근대성을 상징하는 남성복으로 자리매김했다. 산업화와 더불어 ‘이성’과 '합리주의’가 사회의 핵심 가치로 부상하고, 공적 및 사적 영역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서 이분법적 사고가 확산되면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더욱 엄격하게 분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성성은 화려함보다는 절제와 이성의 미학으로 재구성되었고, 치장과 장식은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슈트는 유럽 제국주의의 팽창과 함께 근대성과 권력을 상징하는 복식 규범으로 식민지 전역에 확산되었다. 식민지에서 슈트는 제국 질서의 상징이자 문화적 권력의 장치로 기능하며, 전통 복식 위에 상징적 위계를 씌웠다. 슈트는 ‘문명화된 복식’으로 간주된 반면, 식민지인의 전통복식은 '야만적이고 미개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 논리는 19세기 제국주의 시기에 더욱 공고해졌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도 슈트는 제국 권력의 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 초기 사례로 18세기 아이티(Haiti) 혁명의 지도자이자 노예 반란을 이끈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를 들 수 있다. 그는 지배 권력의 상징을 적극 차용하는 방식으로 슈트의 위계를 전복했고, 이를 통해 스스로의 정당성과 주체성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 유럽식 군복과 슈트를 착용하는 행위로 유럽 제국 권력의 시선에 균열을 만들며 동등한 존재로 자신을 가시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슈트는 서구 근대성, 남성성, 댄디즘, 엘리트주의, 제국주의 같은 의미를 지니며 상징체계를 구축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이 깊게 각인될수록 그 의미 바깥에 있었던 집단이 슈트를 입는 행위는 또 다른 저항의 장을 형성했다. 여성에게는 보수적인 사회와 가부장제 문화에 맞서는 행위로, 흑인 남성에게는 백인 중심 사회의 편견에 전면으로 맞서는 시각적 선언으로 기능했다.
1920년대, 모던 우먼(modern woman)이라 불리던 여성들 중 일부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슈트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직업을 가지며 남성 중심 문화를 교란시켰다. 그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는 여성의 바지 착용이 금지되어 있었고, 예외적 착용 시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길에서 바지를 입은 여성들이 봉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만큼 여성에게 슈트를 입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스타일을 넘어 자유, 행동성, 주체성을 상징하는 강력한 시각 언어이자 규범을 뒤집는 정치적 몸짓이었다.
또한 동시대 흑인 남성들은 백인 중심의 흑인성(blackness)에 대한 편견에 맞서기 위해 슈트를 입었다. 서구 식민주의 시선 속에서 미개하고 야만적인 존재로 타자화되었던 흑인성의 이미지를 되돌리기 위해 그들은 슈트를 통해 스스로의 근대성, 세련됨, 교양을 드러냈다. 슈트는 억압적 제국 질서 속에서도 자신을 '현대적 시민'으로 재현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도구였다.
슈트는 누구의 몸 위에 놓이냐에 따라 권력과 저항, 배제와 전복, 규율과 일탈을 오가며 의미가 달라졌다. 슈트는 몸 위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오브제가 되었다.
나의 슈트는 다시 변주된다.
오버핏 재킷에 허리를 벨트로 조인 나의 슈트는 어떤 고정된 의미도 남아 있지 않는다. 근대성도, 남성성도, 저항의 상징도 아닌, 그저 나의 스타일로 존재할 뿐이다.
옷이 몸을 규정하던 시대에서 몸이 옷을 다시 쓰는 시대로 우리는 이동했다. 그저 입는 사람의 몸 위에서 고정되지 않고, 위치 지워지지 않는 다양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각자의 언어일 뿐이다.